자필수기 / 감사로 충만한 박해섭 이사의 췌장암 투병기

자필수기 /  감사로 충만한 박해섭 이사의 췌장암 투병기

“해, 나무, 새, 지인, 가족 그리고 ‘감사’로 살아났어요!”

갑자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2015년 7월. 회사 일로 무척 분주하던 때다. 양창곡 사장의 임기가 만료되고 새로운 사장이 취임하는 시기였다. 기존 법인을 정리하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여 인계인수를 해야 하는 시점에 내 몸이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조금씩 이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하였으나 ‘별일 아니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소변 색깔이 진해지면서 등이 조금씩 아파왔다. 그러더니 얼굴이 노랗게 되면서 황달이 왔고, 이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큰 병임을 직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증상하고 너무도 비슷하다. 즉시 서무행정 담당인 권 차장을 통해 ‘KMI’라는 건강검진센터에 예약을 하고 검진을 하였다. 그런데 의사가 검사를 하기도 전에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큰 병원에 가기 전에 조부모님과 아버지가 계신 산소에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삼촌과 함께 산소에 다녀왔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 나에게 병을 물려주시려는지 말이다. 그래도 설마 했다. 내가 너무 많이 신경을 써서 몸에 이상이 생긴 거니 치료하면 낫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증세가 너무 심각해졌다. 이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산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고모님 댁에 들려 인사를 드렸다.

내 모습을 보고 너 많이 아프구나 하시면서 놀라셨다. 괜히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이제 다시는 또 못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왜 내게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가?

곧 어찌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것들이 겹쳐왔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아직 가족들하고 이별할 시기도 아닌데…. 친구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우리 아이들한테는 또 어떻게 말하지…. 아들은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딸 역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또 마음 약한 아내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너무 절망적인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창하게 국가에 대한 헌신과 봉사, 사회공헌 등은 못 했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준 적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문득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동안 믿음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하고 나름 봉사활동도 하였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지?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이 부서져 내리는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힘겨운 투병생활이 시작되다

2015년 7월 23일. 집에서 가까운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 가서 검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췌장암이라고 진단이 나왔다. 곧바로 입원하여 치료를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간에 농이 생겨 열이 나서 농을 제거하는 시술을 하였다. 그리고 시작되는 항암치료! 너무도 고통이 뒤따랐다. 남들처럼 고통은 덜한 것 같았지만 기력이 너무 없고, 머리가 빠지고, 몸무게가 54kg까지 빠졌다. 걷기조차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1차 항암 주사가 끝나갈 즈음 여동생은 오빠를 위하여 1천만 원을 낼 테니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며 몸을 추스르란다. 얼마나 고마운 동생인가?

여동생의 남편인 매제도 의료사고로 10년 넘게 장애자로 살고 있어 여동생의 고생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처지인데 오빠한테까지 마음을 써주니 정말이지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여동생은 매제가 병원에서 투병생활할 때 간병했던 간병인까지 소개해주었다.

첫날부터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소독하고 하면서 나의 투병생활은 시작되었다.

딸이 귀국하고 아들도 방학을 하여 귀국하였다. 자식들을 보니 그냥 눈물이 났다.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약해진 나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정말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정성으로 대해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아들은 아빠 옆에서 간호하겠다며 1년간 휴학을 하고 들어왔다. 아내는 멘붕 상태였어도 앞으로는 실질적인 가장으로 가정을 이끌어가야 된다는 마음에 더 열심히 강의를 하러 다녔다.

강의가 끝나면 병원에 왔다가곤 하였는데 심신이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가족 그 누구보다도 마음고생이 많았을 아내!

하지만 나에게 제일 편안하고 가까운 사람이어서 그런지 나는 아내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표현을 하기가 싫었다. 아내의 고생과 헌신은 남편을 위하여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감사합니다”를 되뇌다

2015년 9월 14일. 여동생이 구해준 양평의 용문관광단지 입구 인근의 산자락에 있는 펜션에서의 투병생활은 시작되었다. 나에게 여름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가을이 빨리 찾아왔다. 항암 주사로 인하여 걷기조차 힘이 들고, 입안이 다 헐어서 조금이라도 매운 것이 들어가면 먹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맛이 좋았다. 새벽에 깨어 이렇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매일매일 새벽에 동네 한 바퀴 또는 높지 않은 산을 넘어 용문사까지 걸어서 산책을 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감사합니다”를 되뇌인다. 이렇게 맑은 공기로 숨을 쉬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문득 오프라 윈프리의 5감사가 생각이 났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투병생활 이전에 ‘감사’는 나의 생활의 바탕이자 우리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했다.

회사의 기업문화로 받아들인 감사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감사맨’이 된 나,

흔히 말하는 공주병이 조금 있어 가족보다도 자신이 추구하고 좋아하는 일에 가장 큰 가치와 비중을 두는 아내,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먼저 남으로부터 배려 받고 싶어 하고 항상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다가 안 되면 스스로 외톨이가 되는 딸,

착하고 성실하나 너무 과묵해서 소통과 화합이 부족해 보이는 아들이 감사를 통해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칭찬하고, 솔선수범하고, 선행을 습관화한 덕에 그동안 우리 집은 ‘감사가정’, ‘행복한 가정’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는데 나에 대한 암선고는 충격과 실망 그 자체였다.

‘나작지’ 즉 ‘나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부터’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게 신념이었고 생활이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도 100감사를 써줘야 할 사람이 많은데 여기서 멈춰야 하는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전보다 더 넓고 깊어진 감사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싫었다. 종교도, 감사도….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고, 나의 감사 영역은 그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밤새 통증에 잠 못 이루며 마지막 잎새와 같은 절박한 나의 처지에 슬퍼하다가도 새벽에 환한 햇빛과 새들 소리에 깨어 일어나면 아직 살아있구나 하며 감사하며, 나뭇잎과 산바람의 신선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음에 또 감사하고,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못 먹을 때 간병인 아줌마가 정성을 들여 만들어주는 도토리묵, 산나물 등 산속 자연 채취음식에 또다시 감사한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던 친구들의 끊임없는 병문안에 내가 아직 잊혀진 사람이나 혼자 동떨어져 사는 이방인이 아님에 감사하고, 자주 펜션에 들려 웃음꽃을 전해주는 아내와 딸아이의 재잘거림에 행복해서 또 감사했다.

감사가 있었기에 나의 투병생활은 미움·증오·갈등이 없이 항상 긍정적인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살아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

아니 얼마 살 수 없어도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내 여유로운 마음에 깊이 깊이 감사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투병생활을 하며 응급실에 실려 간 일이 두어 번 있었다. 갑자기 열이 나고 몸의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응급실로 간 것이다. 용문에서 분당서울대학교병원까지 대략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주말이나 저녁 퇴근시간에는 차가 밀려 2시간도 넘게 걸렸다. 이렇게 응급실에 실려 가는 날이면 몸이 너무 힘들어 마음도 다소 약해지고 무력해짐을 느끼기도 하지만 삶의 희망과 가능성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항암주사를 자그마치 12차례에 걸쳐 맞았으나 담당의사의 진료 결과는 아직도 암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고, 암세포가 혈관에 너무 근접하여 수술하기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담당의사는 치료방법을 바꿔 방사선 치료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힘이 쭉 빠져 ‘이젠 힘들어지는가 보다’라고 실망하며 고개를 떨구었지만 펜션에 두고 온 나의 행복 ‘감사’를 계속할 수 있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남을 느꼈다.

내 마음속에 잠자는 영웅인 ‘히어로’(Hope-희망, Efficacy-자신감, Resilience-회복력, Optimism-낙관주의)를 깨워 행복한 나를 만들어 보자는 긍정 마인드를 더욱 거세게 일으켜 세웠다.

별 진전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던 어느 날,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귀가 솔깃해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의 췌장암 전문의를 찾아갔다.

결론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수술을 해도 1년, 안 해도 1년 정도 예상합니다”라는 진단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질문도 못 하고 차를 몰고 용문으로 돌아갔다. 용문에 도착하여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려니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이젠 정말 준비를 해야 되는가 보다. 더 이상은 살 수 있는 희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세포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없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암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요 하나님의 몫이니 어떻게든 이겨내게 하실 것이다’라는 믿음만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하며 ‘지금은 인간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지만 결국은 이겨낼 수 있게 하실 것이다’라는 믿음!

그리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감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감사와 더불어 운동도 더욱 열심히 하였다.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냉이가 파랗게 돋아나고 쑥이 밭과 논두렁 여기저기에서 새싹을 움트고 있었다.

간병인은 지난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워서 도토리묵을 만들어줘서 원 없이 먹기도 하였고, 이젠 봄나물을 캐서 반찬도 하고 국도 끓여서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야말로 자연식을 하는 것이다. 용문에는 취나물과 곤드레 나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많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나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용문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항암치료는 계속되었다. 주사를 맞는 치료는 그만하고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25회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은 후 치료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를 하고 CT촬영을 하였다. 그런데 진단을 하던 의사가 눈이 뚱그래지며 고개를 젓는다.

어찌된 일인지 암세포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러면 암이 완쾌된 것이냐?”라고 질문을 하니까 의사의 결론은

“확답은 할 수 없다. 이런 사례가 극히 드물어서 완치됐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암세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라며 3개월 후에 다시 한 번 검사하자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결과에 놀라워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기적이 생긴 것일까?

금년 3월 21일에 다시 검사를 할 예정이다. 혈액검사 및 복부 CT 촬영 검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정상 컨디션은 아니지만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의 벗으로서 항상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해, 바람, 나무, 꽃, 벌레, 새, 나물 등 용문의 자연, 가장 소중한 가족, 그동안 병문안을 와 준 친구들, 쾌유를 바라는 지인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다.

글=네오디에스 박해섭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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