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필수기 / 감사로 충만한 오숙경 시인의 혈액암 투병기

자필수기 /  감사로 충만한 오숙경 시인의 혈액암 투병기

“백혈병아, 너 참 고맙다”

오숙경 시인

2006년 5월 어느 날
혈액암이라는 절망의 소식이 왔다
독약보다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생명의 은인으로
‘우이당’과 ‘감사’를 만나고
백혈병은 온데간데없고
100감사에서 1,000감사로
딸아이와 함께 감사,
행복의 날들이!

아주 지긋한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사는 일에 어느 정도는 지치고 어느 정도는 단련된 나의 하루가 아직은 무미건조하지 않고 바쁘다는 것은 내가 분명 살아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어둠은 날 재우지 못하고 선 채 졸고 있는 가로등과 추억을 바스락거리는데 맘 속 한기로 한겨울 스웨터라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다.

하루 속히 겨울이 빠져나가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어느새 십년 세월이 되어버린 2006년도의 봄을 소환하려 목을 세워 하늘을 바라보다 혼자 반문해본다.

뭘요? 뭘 더 알고 싶으신데요?

어느 한순간 멈춰버린 내 삶

2006년 5월의 어느 날.

선명하게 파란 빛이 감도는 하늘은 눈부시게 빛나고 거리엔 제철을 만난 이름 모를 꽃들이 한껏 향기를 발산하며 녹색의 몸매를 뽐내고 있는데 나는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다 결국엔 길가 어느 모퉁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한낮은 가고 그날 난 쉬이 잠들지 못한 채 내 설움과 내 한숨으로 밤이 새도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생을 조심스레 꺼내보며 섧게 울어야 했다.

절망으로 수신되던 혈액암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일가붙이들의 슬픈 눈빛들과  마주하며 내 마음을 허기지게 했고 슬프고 암담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참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나의 아픔보다도 더 아프게 내게 전달되어 왔다.

낯설고 힘든 오지여행은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어떤 준비도 없이 시작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약을 복용한 지 한 달쯤 됐을 때부터 부종이 시작되었고, 컥, 컥,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독약보다 더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어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고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부종이 심하여 약을 중단했다 다시 먹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손톱과 발톱은 새까맣게 죽어갔고, 신약이 나왔다 하여 다시 복용한 지 한 달 보름만에 협심증으로 인해 약을 끊어야 했고, 또 다른 약으로 바꿔 먹으니 가려움증이 심하여 밤새 잠도 못 자고, 얼마나 긁어댔는지 등이며 허벅지며 가슴은 거북이 등짝처럼 두꺼워지고 살갗은 새까맣게 변해갔다.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내 삶은 애증의 독을 품고 자꾸 내게서 멀어져 가는 생명줄을 오기로 지키며 무성히 내려앉는 밤을 꼬박 눈물로 지새워야 했다.

혈소판의 증가로 성분 채혈실에서 매일 피를 걸러내고 피가 모자라 수혈을 받으며 고통으로 뜨겁게 젖어가는 시간 속에서도 난 삶의 끈을 놓지 못하고 상처마다 아프게 담금질을 하며 생의 시간을 붙잡았지만, 세상은 내게서 떨어져 나간 듯 적막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고 서러움만 들풀처럼 피어올라 걸음마다 짓밟히며 아픈 걸음으로 절룩이며 닦아왔다.

우이당, 생명의 은인을 만나다

한 시절 거침없이 웃어댔던 나의 시간들이 조각 난 상처를 안고 그렇게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내 생명의 은인이신 우이당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막막한 가슴을 흔들어 깨워주는 선생님의 말씀은 깨알만한 희망도 없이 절망의 기로에 서있던 내게 치료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차올랐다.

그때부터 선생님의 말씀대로 약을 모두 끊고, 배에 소금뜸을 아침저녁으로 올려 몸의 독소를 빼주고, 거북뜸도 시간 날 때마다 배와 가슴에 올려 기를 불어 넣어주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혈자리를 따라 발바닥에 미니뜸을 붙여 혈행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틈만 나면 집에서 뜸으로 치료를 하며 빈혈은 물론 부종도 없어지고 다른 부작용 없이 몇 년을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거짓말 같았고 달콤한 피로에 젖어 한순간 단잠에 들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건강이 좋아지며 단단하게 굳어만 갔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질 무렵,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내게 살갑지 않았다.

진통제에 의존하여 하루를 연명하면서도 난 그들과 마주할 하루를 그려보며 고통을 감내했건만 그들은 내 맘 같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의 반을 그들에게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어처구니없게도 또 그들에게 내 발목을 내어주고 그들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을까? 후회도 하고.

그 어린애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쩔 수 없었어.

수긍도 하며 애써 태연한 척 마음을 키웠지만 섭섭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봄이 왔어요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이며 몸은 다시 악화되어 걷기조차 힘들 때 딸아인 자꾸만 어긋나는 감정들로 얼굴 붉히며 같이 사느니 차라리 독립을 하겠다며 허락도 아닌 일방적 통보를 해왔다.

딸아이가 그렇게 떠나고 절망과 배신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슬픔에 젖어 내가 뭘 잘못했나, 갸웃거리며 생각해봤다.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절름발이가 되었을까?

혼자 그들을 키우며 기대했던 마음들이 너무 컸었나?

내 맘 조금 덜어내면 다시 괜찮아지려나?

급속도로 몸은 망가져 갔고 그쯤에서 나는 내 삶에 쉼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 데면데면한 채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딸아이에게 문자가 왔다. 난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식처럼 느껴졌다.

지나간 시간을 품고 묵묵한 단절로 나도 아예 마음을 닫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딸에게 전화가 왔다. 내게 100감사를 썼다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엄마, 고마워요” 했다.

‘지 에미 싫다고 뛰쳐나갈 땐 언제고 무슨 100감사? 차라리 속 시원히 속내를 드러내지?’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 내게 감사할 게 그렇게 많았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널 사랑으로 맘에 품고 있을 때 그렇게 서로 이해하며 조금씩 배려했다면 적어도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테고 이렇게 상처가 되진 않았겠지.

100감사에서 1,000감사로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볶으며 또 며칠이 지나도록 매일 반복되는 감사의 문자에 조금씩, 조금씩 나도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 인간관계에 일방적인 게 어딨어? 혹, 내 혼자 삐걱대며 어긋나고 오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쩌면 일방적인 내 생각에만 깊이 빠져 엉뚱하게 가지가 뻗어나간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100감사를 쓰면서 딸아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내게도 100감사 쓸 것을 권유했다.

나는 그때 두통과 부종으로 걷기도 앉아 있기도 힘들었지만 달라진 딸애의 모습에 나도 한 번 써보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100감사는 진한 감동 속에 1,000감사로 이어졌고 갈등과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그들이 아닌 나의 흔들림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겨울이 조금씩 봄에게 햇볕을 내어 주고, 봄은 여름에게 뜨거운 태양을 양보하고, 여름은 가을에게 높고 맑은 하늘을 내어주듯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렇게 산다면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그렇게 감사를 쓰면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미움과 원망과 분노는 사라져 갔고, 점차 마음의 평안을 찾으며 다시 건강관리를 위해 뜸 치료를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의 지독한 두통이 사라져 진통제를 끊고도 거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몇 발자국 떼고 주저앉고 다시 일어나 발자국 떼기가 힘들었던 나의 걸음은 북한산을 향했고, 가슴을 쥐어짜던 통증도 희미해져갔다.

이제야 내 몸에 맞는 옷을 제대로 찾아 입은 듯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십여 년의 투병생활에 지쳐 있을 그들의 허물어진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젖은 눈망울을 끔벅이며 곁을 지키던 그들을 이젠 내가 쓰다듬고 안아줘야지.

이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게 없다지만 난 그들과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껏 우여곡절을 겪으며 십년 세월 견뎌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병마와 싸우며 꿋꿋이 버텨준 내게도 참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다. 겹겹이 쌓여가는 시간의 두께에 이젠 서로 어깨 내어주고 마음 내어주며 살아온 과정을 통하여 얻은 행복이기에…”

건강을 되찾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오숙경 시인(앞줄 왼쪽 첫번째).

병마를 이겨내게 해준 모두에게 감사! 내게는 칭찬!

100감사를 쓸 수 있도록 제안해주시고 언제나 딸처럼 보살펴주시는 안남웅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계획은 했어도 실행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딸에게 물러서지 않고 권해서 100감사를 행하게 했던 김용환 감사나눔신문 사장님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100감사를 쓰며 그저 낙서투성이인 종잇장이 되지 않게 마음을 다한 딸에게도 감사한다.

지금껏 우여곡절을 겪으며 십년 세월 견뎌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병마와 싸우며 꿋꿋이 버텨준 내게도 참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다.

겹겹이 쌓여가는 시간의 두께에 이젠 서로 어깨 내어주고 마음 내어주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얻은 행복이기에 이대로 쭈욱 행복의 유효기간을 늘리며 꽁냥꽁냥 잘살아야겠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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