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윤석철 명예교수

감사나눔 포럼

감수성 + 상상력 + 탐색시행 = ‘주고받음’(삶의 정도)
서울대 윤석철 명예교수

“감수성, 상상력, 탐색시행 등 3가지 노력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주고받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노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3 노력을 삶의 정도(正道)를 가기 위한 노력의 3요소라 부르자.”

인간은 일(work)을 해야만 살(live) 수 있는 존재이다. 일을 잘하면 물질적 풍요는 물론 정서적 행복도 가능해진다.

문제는 인간이 하는 일이 모두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을 거쳐야 한다는 데 있다. 생존경쟁에 임하는 방법론적 자세로 4가지 기본모형을 살펴보자.

1 모형 <너 살고, 나 죽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모형이다. 예수에게 ‘너’는 죄 많은 인간들이었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인간의 세계에서 이 모형에 해당하는 케이스를 한국 근대사에서 찾아보면, 월남전 때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다.

그는 한 신병의 실수로 떨어뜨린 폭발 직전의 수류탄으로부터 부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서 산화했다.

2 모형 <너 살고, 나 살고>

이것은 공자(孔子)의 ‘인(仁)’ 모형이다.

오행(五行) 사상(思想)에서 仁은 (생명을 상징하는) 목(木)에 속하고, ‘人+二’의 결합이므로, ‘너’와 ‘나’ 둘(二)이 다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너 살고, 나 살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만 개발한다면 이 모형은 가장 이상적인 생존양식이 될 수 있다.

3 모형 <너 죽고, 나 죽고>

이것은 한국형 부부싸움 모형에 해당할 것이다. 좋게 보면 모두 같이 죽음으로서 공평성(公平性, fairness)이라도 지향(志向)하자는 정신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 경쟁기업간 해외건설 수주, 혹은 바이어 쟁탈전에서의 자세가 이 모형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 모형은 ‘너’와 ‘나’ 모두를 파괴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생존모형이라 할 수 없다.

4 모형 <너 죽고, 나 살기>

이것은 자동차로 행인(行人)을 친 후 자기 살기 위해 몰래 달아나는 뺑소니 운전사 모형이다.

기업의 경우 소비자를 기만하면서 단기적 이익극대화를 추구하거나, 대기업이 자신의 원가절감노력을 하청중소기업에 (강제적으로) 전가하는 경우가 이 모형이 된다.

이상의 4가지 모형 중에서 ‘나’ 혹은 ‘너’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죽어야 하는 경우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모형이 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길은 <너 살고, 나 살고>, 즉 인(仁) 모형뿐이다. 이 모형의 실제적 형태로 존재 가능한 ‘주고받음’에 의한 생존모형을 살펴보자.
 

‘주고받음(give & take)’의 생존모형(生存模型)

지구상(地球上) 생존의 역사를 보면 자기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생존기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일찍이 곤충과 포유류에서 나왔다.

꽃 피는 현화식물(顯花植物)의 꽃가루와 꿀을 먹이로 선택한 곤충들은 자기 생존기반인 현화식물의 번성을 돕기 위한 가루받이 서비스 기술을 개발하기에 나섰다.

또 식물의 열매를 먹이로 선택한 포유류도 열매식물의 씨를 멀리까지 운송해 주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며 생존기반의 번성을 도왔다.

그 결과 곤충류와 포유류는 공히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에 성공한 종이 되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 Mauss)는 재화와 서비스, 말(言)과 상징, 그리고 ‘사람’의 ‘주고받음(give & take)에 의해 인간사회의 삶이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인류학에서는 결혼까지도 그 본질적 의미를 부족간, 가문간 ‘사람’의 주고받음으로 본다.

자기 누이동생을 이웃 마을로 시집 보내고, 그 마을에서 자기 부인을 맞아오면 이것은 마을과 마을 사이 ‘사람의 주고받음’이 되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 속의 ‘주고받음’은 먹이의 제공과 번식을 도와주는 차원이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물질적, 정신적, 정서적 가치가 ‘주고받음’의 내용이 된다.

그러면 인간 사이에 이러한 주고받음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하여 필요한 인간조건(人間條件)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1. 감수성(感受性 sensibility)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받음’이 가능하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므로 상대방(고객)의 필요와 아픔, 그리고 정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을 감수성(感受性 sensibility)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감수성의 실제(實際)가 어떤 것인지 사례를 통하여 알아보자.

<국가 정치차원의 감수성>

세종대왕은 백성을 정치의 고객으로 생각하고, 고객의 필요와 아픔이 무엇인지를 감지하는 능력, 즉 감수성을 발휘했다.

세종의 감수성은 훈민정음 반포문(頒布文)속에 “내가 글 모르는 백성의 아픔을 딱하게 여겨서(予爲此憫然)”라는 구절 속에 명확히 나타나있다.

기업경영에서도 경영자는 감수성을 발휘하여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 혹은 서비스를 개발하여 제공해야 한다. 역사적인 케이스 하나를 살펴보자.

<기업의 경영차원>
우리나라 경기도 안성에서 시리얼(cereal) 식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 켈록(Kellogg)사는 켈록(W. Kellogg)에 의해 1905년 미국에서 창업되었다.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켈록은 소화기(消化器)전문 내과병원에서 25년간 잡역부로 일하면서 입원 환자들의 급식까지 도맡았다.

그러던 중 환자들로부터 ‘빵을 먹으면 속이 불편하다’는 푸념을 들었다. 이 푸념에 대한 켈록의 감수성은 ‘민연(憫然)의 정(情)’으로 나타났다.

환자들의 속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빵 속에 남아 있는 효모(yeast)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 켈록은 효모를 사용하지 않는, 빵의 대용식을 만들기 위한 실험에 들어갔다.

켈록은 밀을 삶아서 롤러(roller)로 얇게 밀어내는 방법으로 실험을 해보았으나 환자들이 환영하는 식품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켈록은 밀을 삶는 시간, 눌러내는 룰러(roller)의 압력과 속도 등 데이터를 바꿔 가면서 꾸준히 실험을 계속했다.

무수한 실험 끝에 드디어 환자들이 좋아하는 식품이 탄생했고, 켈록은 이 식품을 시리얼(cereal)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퇴원한 뒤에도 시리얼을 우편으로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감수성 이외에 인간 사이에 주고받음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하여 필요한 제2의 조건은 상상력이다.
 

2. 상상력(imagination)

인류의 문명발달 역사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1870년대까지도 촛불이나 가스등이 고작이었다. 이들 불빛은 조도(照度)가 낮아 밤일 하는 사람들 눈을 아프게 했으며 바람이 불면 쉽게 꺼졌다.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의 감수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류의 양극(兩極) 사이에 연결되어 밝은 빛을 내는 물질이 있을지 몰라!’ 하는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물질을 찾기 위한 끈질긴 노력 끝에 1879년 백열등을 발명했다.

백열등처럼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처음 만들어내는 일을 우리는 ‘창조’라고 부른다. 인간의 창조성을 분석한다는 것은 창조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창조성에는 그만큼 신비로운 요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창조과정에는 상상력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르셀로나의 불화살>

올림픽경기 개회식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의 하나는 성화 점화일 것이다. 그래서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좀더 감동적인 방법으로 성화를 점화시키려고 부심한다.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방법은 그 동안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진부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감수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참신한 ‘신제품’을 개발하기로 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불화살에 의한 성화점화였다.

연료(가스)가 분출되는 성화대 위로 불화살을 쏘아 올려 점화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올림픽 경기장은 물론 TV를 지켜본 전 세계 관중들로부터 참신하고 스릴(thrill)있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여기서 한국 국민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만약 불화살 점화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했다면, 우리가 양궁왕국임을 과시하면서 우리 기업의 정밀조립제품을 선전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정밀조립제품은 말초신경의 안정성을 요하고 그것은 활을 잘 쏘는 조건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울 올림픽에서 불화살 점화를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은 간단하다.

우리가 그 때 그것을 상상(imagine)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3. 탐색시행(探索試行)

그러나 상상력에는 문제점이 있다. 인간이 상상한 것이 실제(reality)와 부합(附合)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현가능성(feasibility) 여부(與否)를 판별하는 실험이 필요하다. 이런 실험을 탐색시행(探索施行)이라고 부르면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등의 필라멘트 소재를 찾아낸 방법이 탐색시행이었다. 전기의 양극 사이에 어떤 물질을 삽입한 후 전류를 걸어보면서 그 물질이 빛을 낼 수 있는지 여부를 탐색한 것이다.

에디슨의 연구일지에 의하면 그는 연구실 조수(助手)의 수염까지 뽑아 실험해 보는 등 수천 가지 물질을 대상으로 탐색시행을 계속하면서 드디어 백열등 필라멘트의 소재를 찾아낸 것이다.

탐색시행을 통하여 발견한 지식을 우리는 노하우(know-how)라고 부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사를 보면 이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탐색시행이 먼저 성공한 경우가 많다.

1903년 라이트 형제도 이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수한 탐색시행 끝에 비행기를 띠우는데 성공했다.

이론을 모르면서 성공을 거둔 위대한 발명품 중에 X레이(ray)도 있다. 1895년 당시 무명의 과학자였던 뢴트겐은 (다른 실험 도중) 우연히 X레이를 발견했다.

사진 건판(乾板)을 감광시키는 것을 보면 분명 빛의 일종인데 그 정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었다. 그래서 미지(未知)의 빛이라는 뜻에서 (수학에서 미지의 변수를 X라고 놓으므로) X레이라고 부른 것이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X레이를 이용하여 부러진 뼈를 촬영하기 시작한 몇 년 뒤에야 X레이에 관한 이론이 나왔고, 뢴트겐은 노벨상도 받았다.
 

맺음말

빨강, 노랑, 파랑 3가지 색을 색의 3요소라 부른다, 이들 3색만 있으면 이들의 적절한 결합으로 다른 모든 색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제시한 감수성, 상상력, 탐색시행 등 3가지 노력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주고받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노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3 노력을 삶의 정도(正道)를 가기 위한 노력의 3요소라 부르자.

삶의 정도
윤석철 지음
위즈덤하우스

※ 이 글은 지난 4월 11일 여의도 조찬모임 명강의를 압축정리한 것으로, 서울대 윤석철 교수가 직접 정리해서 보내준 내용입니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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