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증언 /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스코필드 박사 회고

“석호필 박사는 대한민국 치료한 의사였다”
육성증언 /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스코필드 박사 회고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 의장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지난 2월 22일 기자회견장에서 스코필드 박사와의 특별한 인연과 소감을 소개했다.

정 전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는 식민과 독재 등의 아픔을 극복하려 진통을 겪었던 대한민국을 치료한 의사였다”고 규정했다.

(편집자)

정운찬 전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와 맺었던 10년의 특별한 인연과 그 과정에서 느꼈던 소감을 장시간에 걸쳐 소개했다. 발표 직후 정 전 총리가 기자와의 사진 촬영에 응했다.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1960년 4월,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70년 4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그 10년 동안 나는 스코필드와 동행했고, 그 시절 나는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배웠다.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제34인’으로 불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교수로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그는 선교와 강의를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고, 우리나라의 독립(1916~1920)과 발전(1958~1970)에 헌신했다.

3·1만세운동 때에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일본의 만행을 기록하여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지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결같았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작됐다. 당시 우리 집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학비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초등학교 때 친구 아버지인 서울대 이영소 교수의 주선으로 나는 스코필드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나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지주로서 나의 가치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등학교 때는 성경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것 못지않게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에는 고양이라도 웃길 정도로 익살스러우면서도 우리가 성경반에 지각한 이유를 둘러댈라치면 “핑계대지 마시오!”라고 또박또박 우리말로 꾸짖으셨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그의 숙소를 자주 드나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할아버지는 사슴처럼 선한 얼굴로 나를 “운찬~” 하고 부르곤 했는데, 손자뻘인 나에게 한 번도 존칭을 생략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예의와 품격을 갖추었던 분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꼭 엽서나 편지로 내게 안부를 전했을 만큼 자상한 분이기도 했다. 몇 달씩 외국에 나갔다 돌아오는 그를 마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가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내 가슴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그분의 철학적 신념이었다.

나는 보행이 불편한 그를 부축하며, 대학로를 산책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강조했다. 항상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특히 건설적 비판정신을 기르라고 강조했다.

스코필드의 이런 가르침은 훗날 내가 1986년 “체육관 선거를 종식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교수서명운동을 준비하도록 한 원동력이 됐고, 아직도 내 신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올곧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개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스코필드 박사는 국립의료원에서 운명했다. 임종 며칠 전에도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끝까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마지막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재산을 모두 보육원과 YMCA에 헌납하고 떠났다. 그리고 빈 몸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돌이켜보면 백발이 성성한 70대 할아버지와 철없는 열세 살배기 꼬마의 만남이었거늘, 그는 나를 한결같이 성숙한 인격체로 대했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의 축복이자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는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한다. 양지바른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자애로운 미소로 내게 말을 건네시는 듯하다.

더 부지런하게, 더 정직하게, 더 정의롭게 사랑하며 살라고….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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