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특별기획 중국의 노먼 베쑨, 한국의 스코필드

삼일절 특별기획

감사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노먼 베쑨, 한국의 스코필드

중국 대륙에 2년 동안 머물렀던 노먼 베쑨(오른쪽 사진)은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불리며 지금도 기억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반도에 16년 동안 머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스코필드(왼쪽 사진)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저는 행복나눔125운동이 삼일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까지 1단계 완성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통일이 되기 전에 대한민국이 먼저 행복한 사회가 되어 있어야 북한의 동포들과 함께 행복한 통일한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나눔신문 2014년 6월 1일자 손욱 회장 기고문 중에서)

 

기억은 구원의 비밀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지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이스라엘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 전시실 2층 동판에 새겨져 있는 문구입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저주를 받지만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은 구원을 받는다는 이 메시지가 우리의 폐부를 깊숙이 찌릅니다.

과거에 대한 망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삼일절 아침에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노먼 베쑨(1890~1939)과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두 사람은 많은 점에서 닮았습니다. 우선 두 사람은 같은 캐나다 출신이었고, 토론토 대학에서 공부했고,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고, 아시아에서 인술을 펼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자신이 정착한 나라에서 운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이도 한 살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노먼 베쑨은 중국에서, F. W. 스코필드는 한국에서 활동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중국식 이름과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닮았습니다.

베쑨은 바이츄언(白求恩), 스코필드는 석호필(石虎弼)로 불렸습니다. 바이츄언은 ‘흰 머리의 은혜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석호필은 ‘돌과 같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처럼 엄격하고 약자에게는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대하며 돕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弼’은 도울 필).

그런데 사후에 두 사람에 대한 양국의 기억의 강도는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노먼 베쑨은 중국 인민의 기억 속에서 뜨겁게 부활했지만, 스코필드는 한국 국민에게 오랫동안 낯선 이름으로 취급받으며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우선 두 사람의 인생 내력부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먼 베쑨의 중국 사랑

1890년 태어난 노먼 베쑨은 1938년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베쑨은 쑹칭링이 대표로 있는 중국원조협의회의 요청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한 터였습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항일전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옌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을 만나 부상병 치료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고 의무대를 꾸려 전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최전선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네룽전의 팔로군 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병 치료에 나섰습니다.

노먼 베쑨은 중국에서 부상병 치료 중 수혈할 혈액이 모자라면 자신의 피를 뽑았습니다. O형인 자신의 혈액은 누구에게나 수혈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요.

그는 부상병 치료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중보건과 의료시설 개선에도 힘썼고, 자신의 의술을 많은 중국인에게 가르치고 베풀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고 의약품 원조도 요청했습니다.

1939년 가을 노먼 베쑨은 사경을 헤매던 병사를 수술하던 중 메스에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것이 불행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간단한 의약품으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열악한 의료 여건 속에서 그 실수가 패혈증으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노먼 베쑨은 1939년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코필드의 한국 사랑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F. W.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에비슨의 요청으로 1916년 한국에 들어와 세균학, 위생학, 병리학을 가르쳤습니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관심과 애정을 보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스코필드는 카메라를 들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로 나가서 시위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그해 4월 15일 삼일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병사들이 화성군 제암리를 급습해 교회당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 참사 소식을 전해들은 스코필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학살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해외 언론을 통해 일제의 비인도적인 학살 행위를 폭로했습니다.

스코필드의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세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된 학생들을 직접 찾아가 진상규명 활동을 벌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여자감방 8호실’을 방문해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 등을 만나 그들에게 심한 고문과 폭력이 가해졌음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스코필드를 ‘가장 과격한 선동가(Arch Agitator)’로 낙인찍었던 일제는 1920년 그를 국외로 추방시켰습니다.

1958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스코필드는 이번에는 고아와 과부 등 약자를 돌보면서 언론 기고를 통해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12년 후인 1970년 제2의 조국 한국에서 81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노먼 베쑨의 동상은 중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사진은 스코필드 박사의 흉상.

영원한 친구, 망각의 존재

죽음 이후 두 사람에 대한 양국 일반 국민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우선 노먼 베쑨이 마흔 아홉 살 나이로 숨을 거두었을 때 중국인들은 통곡했습니다.

“노먼 베쑨은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무기를 가지고, 즉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통해 투쟁했다. 그는 자신의 분야인 의학에서 전문가이자 개척자였다.”

쑨원의 아내 쑹칭링이 베쑨에게 바친 헌사입니다.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주더도 이런 헌사를 바쳤습니다.

“중국 인민은 사랑과 숭모의 정으로써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인간들이 영원히 그의 이름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우리는 비탄의 눈물로써 그리고 배전의 용기로써 그의 희생을 ‘몸’으로써 기억할 것이다.”

이어서 마오쩌둥은 “우리는 한 인간의 서거 이상의 것을 통곡한다”고 말하면서 노먼 베쑨을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불렀습니다.

이후 노먼 베쑨의 뼈가 묻혀 있는 중국 화북 지역에는 장중한 묘역이 꾸며졌고, 중국 곳곳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과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노먼 베쑨은 지금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에드거 스노와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인물 4인 중 한 명입니다.

 

과거를 스승으로 삼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스코필드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스코필드기념사업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이항 서울대 교수가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타계하기 2년 전인 1968년 박사에게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정식으로 스코필드 박사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4년 전부터였다.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이 1970년이니 무려 32년 동안 망각의 늪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스코필드라는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그 분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하다.”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

사마천이 했다는 이 말을 직역하면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다가올 일의 스승이 된다’가 됩니다. 의역하면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감사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푸른 눈의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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