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 글쓰기로 권태의 강을 건너요”

감사 쓰기가 심드렁합니까?
“3인칭 글쓰기로 권태의 강을 건너요”

왜 쓰기만 할까?

감사 에너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현재의 보편적인 툴(tool)은 쓰기이다. 5감사, 50감사, 100감사, 감사일기 등 대부분 쓰기를 통해서 개인의 감사가 증대된다.

다른 툴은 없을까? 물론 있다. 평소에 항상 “감사합니다”를 말끝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모두가 본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식하지 않아도 툭툭 나오는 말이 되었다. 진정으로 감사해서 그런 것인지, 의례적인 마무리 멘트인지 그 헤아림은 불필요하다.

누군가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진짜 감사해요?”라고 되묻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감사합니다’가 ‘안녕하세요’처럼 인사말의 한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사의 체질화, 습관화가 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다 보니 오래 지속하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

왜 그럴까?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쓰는 행위가 새로운 발견 속에 성찰을 깊게 한다고 하지만, 글쓰기는 말하기처럼 우리 본능에 아직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더 오랜 세월 유전적으로 남아 있다 보면 가능해질까, 현재로서는 요원한 게 맞다.

정말 감사를 일상화하는 데 다른 툴은 없을까? 현재로서는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오직 머리에 쥐 날 정도로 쓰기만 해야 할까? 혹 가끔 쓰면서 감사 에너지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제안을 해본다.

 

현재로선 쓰기밖에 없다

감사 쓰기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기존의 관점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감사를 쓰면서 스멀스멀 달라지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질까? 대부분 우리의 기억은 무의식에 들어가 있다. 그것을 의식 위로 올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글쓰기만큼 효과가 큰 것은 없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즉 무의식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할 때에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의식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논란은 있지만, 무의식과 글쓰기의 연결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이론이다.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 올라오는 기억들이 왜 쓰면서 자꾸 바뀌는 것일까? 그것은 기억 또한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에는 말과 글뿐만이 아니라 이미지(그림)도 포함하고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들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모습들이 그 당시 그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여러 상태에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매개가 ‘감사’이니 긍정적 관점이 형성된다는 원리이다.

 

3인칭 글쓰기

관점의 시선은 모두 ‘나’이다. 이 ‘나’를 항상 주어로 해서 쓰다 보면 감정에 부하가 걸릴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나로 집중되다 보니 몸도 마음도 무거워진다.

여기에 한 방법이 있다. ‘글쓰기 치료’에 나오는 내용을 옮겨본다.

“많은 소설가들이 주인공의 목소리를 결정하는 데 무척 고심한다. 이야기가 3인칭 화자와 달리 1인칭 화자로 시작되었을 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음의 심리적 외상에 대한 에세이의 처음 두 문장을 살펴보자.

1인칭 화자: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나는 누나와 엄마 간의 감정적인 싸움의 덫에 갇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했으며 그들의 싸움에 나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항상 느꼈던 고통과 슬픔이 되살아난다.

3인칭 화자: 그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그는 누나와 엄마 간의 감정적인 싸움의 덫에 갇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했으며 자신들의 싸움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항상 느꼈던 고통과 슬픔을 되살아나게 했다.”

3인칭의 글도 형식만 그럴 뿐 실제로는 1인칭이지만, 형식을 달리 해보면 다른 관점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부드러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김서정은 태양이 뜨는 것을 보아서 감사합니다.
김서정은 해가 지는 것을 보아서 감사합니다.
김서정은 어깨가 축 처진 김서정을 보며 위안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김서정은 일이 안 풀리는 김서정에게 격려를 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김서정은 김서정을 사랑할 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쓰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래도 가끔 나를 삼자의 관점으로 돌려 들여다보는 것, 그 매개로 감사를 정하는 것, 관점의 변화를 더 크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감사 쓰기가 심드렁해질 때 꼭 시도해보자.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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