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CO와 박태준 회장에게 감사를 (1)

 

1965년 6월 초,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텅스텐을 수출하기 위한 방일이 아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과 관련된 특수 임무 수행-일본의 제철 전문가를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군정(軍政)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던 1961년 가을, 의장과 상공담당 최고위원은 1차 계획에 종합제철소 건설을 포함했다. 산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한 기간산업 중의 기간산업으로 ‘석유와 철’을 꼽으면서, 석유는 수입해올 수밖에 없지만 철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결의도 다졌다. 그것은 지난 3년 6개월 동안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무거운 탁상공론처럼 다뤄오다가 1965년 들어서야 가장 중요한 국가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철은 산업의 쌀이며 국가 기간산업 중의 으뜸이다. 바늘, 나사에서 조선, 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에 철이 필요하고 철 없이는 생활도 유지할 수 없다. 종합제철은 철 생산의 모든 공정을 일관으로 처리하는 설비를 두루 갖춰 모든 형태의 제품을 생산함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제철’하면 으레 종합제철을 말하지만, 1960년대에는 둘의 개념을 구분했다. 당시 한국에는 종합제철에 명실상부하는 제철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선·제강·압연 공정을 다 갖춘 종합제철소를 세워 안정적으로 ‘산업의 쌀’을 공급해야 했다.

한반도에 근대적 제철소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18년 6월로, 일본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려는 장기적 포석으로 황해도 송림에 겸이포제철소를 건설했다. 1일 생산량 150톤의 미국식 제1고로를 세우고, 이어 같은 용량의 제2고로까지 세워 쇳물을 생산했다. 후판공장은 5만 톤 규모로, 주로 함선 제조용 후판을 생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군비를 축소하며 해군 88함대 건조를 중지하자 1922년 조업을 중단했다.

만주사변(1931)에 이어 중일전쟁(1937)을 획책한 일본은 군사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1937년에 쇳물을 연간 35만 톤 생산할 규모의 청진제철소를 건설했다. 항만을 갖춘 함경도 무산 지역의 철광석과 만주 길산의 연료탄을 활용하기에 알맞은 위치였다. 청진제철소가 제대로 가동되는 무렵에 이미 긴장을 넘어 대립으로 치닫던 미·일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미국은 대일 철강 수출을 축소하고 일본에 대한 전면적 고철 금수 조치를 단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1943년 삼척에 제철소를 신설한 것도 군수용 철의 부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5감사

1.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산업화 계획을 세워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2. 기간산업 중의 기간산업으로 ‘석유와 철’을 꼽아주신 혜안에 감사합니다.
3. “철은 산업의 쌀이며 국가 기간산업 중의 으뜸이다”라는 인식에 감사합니다.
4. 철강 국가 건설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제철 전문가를 만나주신 것 감사합니다.
5. ‘종합제철소’라는 획기적인 발상이 오늘의 포스코를 만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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