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가족끼리 감사 표현 못해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 줄이자

김인홍(90) 김연우(85) 부부는 옥천읍 대천1리 ‘꼭대기집’에서 꼬박 63년을 살아왔습니다. 취재중에 “이 동네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신 어르신이 누구냐”고 물어서 즉석 섭외한 분들입니다. (사진 제공=옥천신문)

 

자식보다 살가워 알면서도 속아줘?
며칠 후면 추석입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도시의 많은 자식들이 귀향길을 서두를 것입니다. 문득 한 영화의 광고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당신의 부모님은 안녕하신가요?”

2015년 개봉한 영화 ‘약장수’(감독 조치언)에는 관객을 잘 웃기기로 유명한 배우 김인권과 박철민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대다수 성인 관객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시골 노인을 상대하는, 유통업을 표방한 사기단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이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불쌍한 할머니들 사기 쳐서 먹고 살라는 얘기냐?”

“여기 오시는 할머니들한테 물어봐. 하루 네 시간씩 노래 불러주고, 재롱 떨어주는 우리가 자식보다 낫다고 할 걸?”

시골 노인을 상대로 한 사기단의 수법은 대략 이렇습니다. 우선 노인들을 한 자리에 모은 다음 안마도 해 주고, 쇼나 서커스도 보여주고, 식사도 무료로 대접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열고 종국에는 수백만 원대의 의료기기를 팔아치웁니다. 

노인들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 속는 것일까요? 한 기자가 만난 취재원에 따르면 ‘불편한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노인들도 알 것은 다 압니다. 그분들은 그냥 고마워서 돈을 내는 겁니다.” 

사기단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연락도 없는 자녀 대신 말동무를 해 주는 그들에게 기꺼이 속아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영화 ‘약장수’ 광고 문구에도 ‘자식보다 살가우니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결국 가족끼리 감사표현을 못해서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은빛자서전에서 찾은 희망의 단서
그렇다면 해법은 있을까요? 물론 이런 현상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 자본주의와 경쟁지상주의 등 사회구조적 문제와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족끼리 작은 감사표현을 하는 것조차 ‘오글거린다’면서 어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소극적 태도를 한 번쯤은 돌아볼 시점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7년 11월부터 옥천신문과 공동으로 추진해온 ‘풀뿌리 감사나눔운동-은빛자서전 프로젝트’에서 작은 희망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지면에 미처 담지 못했던 뒷이야기를 지금부터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은빛자서전’은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옥천 지역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인터뷰해 살아온 인생을 자서전 형식으로 정리하는 코너입니다. 아울러 자녀나 후손들의 감사편지도 받아 실음으로써 세대 간 대화와 소통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감사인사, 감사전화, 감사편지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감사표현은 분명하게 농촌의 부모와 도시의 자녀 간 불통을 해소하고 소통과 화해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10개월 동안 20회에 걸쳐 진행해온 은빛자서전 중 실제 사례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주말 아침마다 부모님께 감사전화를 드리자

최영세(86) 이옥임(84) 부부는 공부를 잘 했던 딸 넷을 가난 때문에 대학까지 공부시키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들은 “공장에 보내지 않고 여고까지 공부시켜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부모를 위로했습니다. (사진 제공=옥천신문)

 

‘월 40일 근무’ 기록 남긴 아버지
문병규 씨(81)는 북한 출신, 고아원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옥천에 살고 있었던 이모를 찾아오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옥천에서 만난 아내의 “북한 출신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긍정적 신뢰와 기대에 힘입어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5남매를 공부시키려 경부고속도로 공사판에서 일할 때는 주야간 근무를 자청해 ‘월 40일 근무’라는 경이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문병규 씨는 고아 출신이었기에 타인의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긍정적 마인드로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평남 진남포 출신 천애의 고아가 옥천에 와서 아내를 만나 5남매와 그 배우자(10명), 손주들(10명)까지 총 22명의 대가족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온 가족이 모여 생일잔치나 김장을 하느라 떠들썩한 날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문병규 씨의 자녀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감사편지를 써볼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첫날 반응이 흔쾌하진 않았습니다. ‘북한 출신, 고아원 출신이라는 잊고 싶은 이 가족의 상처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면서 ‘이번에는 감사편지 없는 은빛자서전을 실어야 하나 보다’ 예상하고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서전 초고를 보내드리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다음은 맏아들이 감사편지를 메일로 보내주면서 덧붙인 글입니다. 

“처음 작가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보내주신 자서전 초고를 읽어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아는 부분도 있었지만 몰랐던 부분도 있어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편지 내용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제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은 한결 같으니 잘 정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부모의 건강과 자녀의 감사, 선순환
앞의 답장을 보면서 세대 간 소통과 화해의 매개가 될 수 있겠다는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병규 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50대에 당뇨를 앓았던 그는 매일 3만보 이상 걷고 그라운드 골프를 즐긴다고 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오후 2시경에 인터뷰를 했는데, 그날도 벌써 ‘27,125’보를 걸었더군요. 

아버지는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하고 활력 있는 황혼을 보내고,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 셈입니다.

이런 사례는 또 있었습니다. 공무원 출신인 오공탁 씨(83)의 넷째 딸도 아버지 은빛자서전 초고를 읽어보고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의 드라마틱했던 인생이 잘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6.25 관련 이야기는 자식인 우리도 모르던 내용이었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게 되자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자식들은 앞 다퉈 감사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기사하단 감사편지첨부)

 

이번 추석부터 실천하면 어떨까
어르신들을 인터뷰를 하면서 목격한 장면과 소회를 덧붙여 봅니다. 

우선 어르신들은 외로웠습니다. 주로 연령층이 80대인 그들은 1930년대에 태어나 10대에 해방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20대를 시작한 그들은 발등에 떨어진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폭삭 늙어버린 어르신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난 자식과 손주들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79세인 필자의 어머니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르신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인터뷰하러 온 작가를 위하여 과일과 음료 등을 정성껏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인네 냄새가 날까봐 대청소를 하고 방향제를 뿌렸다고 솔직하게 밝힌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와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어르신들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간 뒤에 저에게 고맙다며 소주 한 잔 하고 싶다고 연락한 분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 어르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칩니다. 조순섭 씨(87)는 한국전쟁 당시 금화지구 최전선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고지전(高地戰) 체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야간 기습작전에 투입됐다가 총탄을 맞고 “간호원”을 외치며 적진 속에서 죽어가던 전우의 절규가 아직도 꿈속에서 들린다고 고백했습니다. 67년을 함께 산 아내도 “처음 듣는다”는 악몽을 고백한 다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이제야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합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신 부모님께 감사전화 드리기와 살아온 인생 이야기 들어주기, 이번 주말 아침과 추석 때부터 실천에 옮겨보면 어떨까요?

 

<감사편지>

코끝 찡하게 하는 아버지의 손톱 밑 때

아버님 마흔이 되시던 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아버님 나이가 많으셔서 조금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장사꾼 아들’이라고 놀리던 친구도 있었지요. 어린 시절 아버님 손톱 밑에 낀 먼지 때가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손 좀 깨끗이 씻어’라고 버릇없게 면박을 주곤 했었지요. 그랬던 제가 어느덧 가업을 이어받아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손톱 밑에 낀 까만 먼지 때를 보면 코끝이 찡해지면서 ‘그 동안 부모님이 정말 열심히 사셨구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옥천읍에서 문구점 ‘학생사’를 60년 넘게 운영해온 87세 이태기 씨에게 막내아들이 보낸 감사편지)

 

엄마, 남은 소풍 시간 부디 행복하세요

지금 엄마는 치매라는 친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치매는 때로는 사람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표정이 가끔 멍해지실 때도 있지만 손녀와 휴대폰 가지고 장난치실 때는 어린 소녀처럼 마냥 천진난만합니다. 어제 저녁 엄마가 부르시던 ‘소양강 처녀’는 가요가 아닌 동요라는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꼭 1년 전에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엄마의 숨어 있던 재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엄마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고백하는 표현의 통로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5남매 우애 변치 않고 건강하게 살게요. 남은 소풍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병 수발하며 5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워낸 82세 유창목 씨에게 맏딸이 보낸 감사편지)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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