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종합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새벽 3시에 일어나 어머니 사진에 큰절하고 하루를 시작
  • 김서정 기자
  • 승인 2018.12.14 14:52
  • 호수 214
  • 댓글 0
감사나눔신문사 감사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연신 ‘감사 쓰기’의 힘에 놀라워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감사 쓰기의 힘
“어머니 50감사를 쓰는 동안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신 일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와 닿았습니다. 다시 고쳐 쓰면서 ‘참으로 감사한 일들이었구나’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의 호탕한 고백입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감사나눔신문 김용환 대표가 도산CEO코칭포럼에 참가하게 되었고, 거기서 이기수 전 총장을 만났습니다. 김 대표는 이 전 총장에게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에게 50감사 쓰기를 권유했고, 그는 긍정의 달인답게 흔쾌히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 전 총장이 쓴 50감사 내용(감사나눔신문 12월 1일자에 소개됨)에 감동을 받은 감사나눔신문은 인터뷰 제안을 했고, 낙천적인 성격의 그는 이것도 역시 단박에 승낙했습니다.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1월 30일 감사나눔신문 감사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인터뷰어 역할은 본지 제갈정웅 이사장이 주로 했고, 도산CEO코칭포럼 백성희 상임대표, 김용환 대표, 이춘선 감사나눔신문 TV편성국장이 함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질문과 답이 오고갔지만, 기자가 위 말을 먼저 뽑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 쓰기의 힘에 주목하고 싶어서입니다.

구체적인 게 자꾸 떠올라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기수 전 총장의 삶 가운데 큰 줄기만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1945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무렵 도회지로 나갈 꿈을 안고 공부를 시작하여 진주, 부산을 거쳐 서울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는 독일 튀빙겐에베르하드카를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뒤 고려대 법대 교수를 거쳐 4번 도전 끝에 총장까지 지내면서 43명의 대학 정교수를 길러낸 입지전적 인물.’
한 문장으로 요약했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범상치 않은 삶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재수, 총장 삼수 등 실패의 쓰라린 순간도 많았습니다. 이 전 총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어머니입니다. 그가 쓴 50감사 가운데 하나를 옮겨오겠습니다.
“진주에서 초등학교 1년과 진주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매월 마지막 주말에 횡천 집으로 가서 월요일 새벽 4시 30분에 진주행 버스를 탈 때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있는 배추국밥을 끓여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이 문장 역시 단 한 문장이지만 이 안에는 이기수 전 총장과 그의 어머니의 평생 관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이기수 전 총장은 이 말을 했습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머니 사진을 보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한 뒤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어머니였는데, 막상 감사를 쓰려고 하니 떠오르지 않는 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쓰면서 그 모습들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처음 쓴 50감사를 다시 고쳐 썼습니다. 새로운 항목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감사 쓰기로 무의식에 잠겨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머니를 만나는 것 같은 생생함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 쓰기는 그만큼 쓰는 사람의 생각을 깊고 넓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구체성 속에서 관계가 더 끈끈해집니다. 

어머니가 만든 대한민국
이기수 전 총장은 본래 철학을 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바꾸어 법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조정과 중재에 능한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어머니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배불뚝이입니다. 많이 배우시지도 못했고 오로지 농사만 지으셨습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입니다. 
그래서 농사철만 되면 물 대기 때문에 동네가 난리가 납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곤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고려대 총장 퇴임 뒤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제10대 대한중재인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전 총장의 삶은 어머니의 환영일지도 모릅니다. 육신은 죽어 없지만 정신은 온전히 아들의 몸에 들어가 아들과 함께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 말입니다. 삶의 중심은 가족에 있다는 어머니의 정신유산을 이 전 총장이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기수 전 총장의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어머니가 만드는 가족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 평등 등을 배웁니다. 그래서 저는 주말이면 가급적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이 모임은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고 제 아들의 제안 때문이었지만, 그 시작은 어머니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께 쓴 50감사’ 족자를 선물로 건네받고는 엄지 척하고 있는 이기수 전 총장. 어머니 500감사, 1000감사를 응원합니다.

가르치지 마라
이기수 전 총장이 요즘 가지고 있는 소원이 있습니다. 증손자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대학원 시절인 25세에 결혼을 했고, 그의 아들 또한 일찍 결혼을 해 49세에 손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 총장의 결혼 스토리를 50감사를 통해 잠깐 보겠습니다.
“196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에 대전에 있는 효임 집에 놀러갔다가 ‘사주에 1970년 1월 10일에 혼인하면 장래가 길하다고 하니, 그 날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장모님께서 말씀하셔서 보름 후인 ‘1월 10일에 결혼하니 준비해달라’고 말씀드렸음에도 ‘좋은 결정했다’고 행복해 하셨음에 감사합니다.”
이기수 전 총장의 어머니가 일사천리로 내린 결단이 없었다면 그의 가족 구성은 오늘날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생전 어머니가 그에게 끼친 영향을 50감사를 통해 또 보겠습니다.
“저에게 한번도 ‘안 돼’라고 부정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아 감사합니다.”
“엄마는 ‘통큰 여성’이셨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일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저를 보고 사람들이 ‘이 교수는 남의 욕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심성은 엄마의 마음가짐에서 제가 배운 것이라 생각되어 엄마의 몸소 실천하신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전수된 이 전 총장의 교육 가치관은 손주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 전 총장의 말입니다.
“조손(祖孫,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교육이 들어가면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밤새워 하는 컴퓨터 게임을 그냥 지켜보면 됩니다. 뭔가를 가르치지 말고 같이 놀아주면 됩니다. 부모가 텔레비전을 보지 말고 같이 책을 읽으면 됩니다.”
자식이 하는 일을 묵묵히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이기수 전 총장 어머니의 정신적인 유산은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증손자에게도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100감사, 500감사, 1000감사
이기수 전 총장의 좌우명은 ‘만도내근(萬道耐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인내와 근면 성실로 임한다)’입니다. 그 정신 또한 시작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50감사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버스를 타는 정류장까지 1km를 함께 걸으시면서 교육해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겨울에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청암면에서 횡천면으로 내려오는 횡천강에서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탈 때에 ‘얼음 속 숨구멍에 빠지면 다시 물위로 솟아날 수 없다’시면서 3km 거리를 달려와서 스케이트를 못 타게 말리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대학교 3학년에 바둑을 배우게 되어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72년 9월 1일부터 육군사관학교 법학과에서 육군사관학교 30기부터 34기까지 가르칠 때에 1973년 봄에 바둑 1급 실력을 갖출 때까지 바둑에 미쳐 있었던 저를 사랑으로 항상 감싸 안아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유전으로 이어져온 인내와 근면이 전적으로 발휘된 것은 고려대 총장 당선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인터뷰를 잠시 보겠습니다.
“―총장직에 세 번 도전 만에 성공하셨는데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듯합니다.
‘입학할 때부터 대학 총장이 돼 학교를 발전시키는 게 꿈이었습니다. 당선 직후 긴 터널을 지나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 학교 발전에 힘쓰겠습니다.”
그렇다면 삼수하는 동안 그의 어깨를 내리 눌렀을 법한 좌절은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아무리 나쁜 거라도 3~4초 머리에 담고는 바로 버립니다. 이것도 어머니가 물려주신 정신적인 유산입니다.”
지금도 그의 가슴속에서 함께 살고 계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회고도 역시 50감사에서 옮겨오겠습니다.
“엄마는 제가 독일로 유학 가기 전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유학 가는 저의 마음에 엄마와의 작별인사를 나누고서 1977년에 유학을 갔고 1979년에 만 60세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하지만 처음 쓴 대로 이기수 전 총장의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지 않고 그와 함께 살아생전처럼 하루를 늘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 동반의 길에 50감사쓰기가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감사 쓰기는 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고랑을 내는 것처럼 깊고 깊은 새김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감사나눔신문은 그에게 50감사 족자를 건네주었습니다. 가슴에 담아 있는 것들이 문자로 되어 있는 것을 다시 보는 그 순간 그의 몸이 잠시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할 것입니다. 또 고쳐 쓰면서 더 많은 항목들이 추가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곧 어머니 100감사, 500감사, 1000감사를 기대해봅니다.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나눔신문을 알게 되어 감사하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감사를 접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서정 기자

김서정 기자  kimsj4416@hanmail.net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서정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