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들의 감사 - 추사 김정희(1786~1856)

조선시대에도 오늘날로 치면 ‘감사엽서’, ‘감사편지’, ‘감사댓글’로 부를 수 있는 다양한 감사표현과 감사나눔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소개합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이상적입니다. 두 사람은 감동적인 사제지간의 감사나눔 미담을 훌륭한 문화재와 함께 후세에 남겼습니다.

1840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추사 김정희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명문 귀족 출신인 추사를 평소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역관 이상적만은 끝까지 스승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켰습니다. 

추사와 인연을 끊지 않고 이어간다는 것은 당시 집권세력의 눈 밖에 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상적은 결국 추사를 찾아갔습니다. 권력보다 의리를 택한 것입니다. 그는 북경에서 어렵게 구한 여러 권의 서책들을 유배지의 스승에게 선물하기도 했지요. 

외로운 유배지에서 귀한 서책을 받아든 추사는 제자의 의리와 정성에 감복해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1844년의 어느날 추사는 먹을 갈고 붓을 잡아 제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하얀 화선지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시리도록 새하얀 설원,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 하나 없는 토담집 한 채, 그리고 그 집을 둘러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 쩍쩍 갈라지는 갈필로 거친 종이 세 장을 이어 붙여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추사는 그림 옆에 이런 글도 적었습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그것은 ‘날이 차가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라는 뜻을 가진 공자의 말씀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과 권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리와 절개를 지킨 제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스승으로부터 ‘감사 엽서’를 받아든 이상적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붓을 들어 스승에게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로 시작되는 ‘감사 편지’를 적어서 보냈습니다.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知己) 분들에게 보이고 시문을 청하겠다”는 말도 덧붙였지요. 

실제로 이상적은 세한도를 청나라로 가져가 문인들에게 보여주었고, 사제(師弟)의 우정에 감동한 중국의 문사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앞 다퉈 시문을 써주었습니다. 이상적은 이를 모아 세한도 그림 뒤에 붙여 두루마리로 표구를 완성했습니다. 

훗날에는 독립운동가 이시영, 오세창, 정인보 선생도 ‘감사댓글’ 달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의 원래 가로 길이는 61cm였지만 나중에는 무려 14m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국보 180호 ‘세한도’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장 

소중한 글입니다.
"좋아요" 이모티콘 또는 1감사 댓글 달기
칭찬.지지.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