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고려대학교 총장 이기수 님이 아내 조효임 님에게 쓴 50감사

 

1. 1967년 가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연주회에서 처 조효임을 만나, 첫눈에 예술적 자질이 있으면서도 이성적이어서, 이 사람이면 나의 놈팽이 기질을 잘 제어해 줄 수 있는 성품을 지녔기에 “아 이 사람이야”라고 나의 반려자(The Best Half)로 확신하게 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 첫 데이트에서 윈스턴 처칠 경의 “승과 패”라는 흑백영화를 피카디리 극장에서 함께 감상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 답례로 저녁식사 초대에 불고기를 무려 5인분을 거뜬히 해치운 나의 배포와 건강함에 감탄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4. 여름방학을 맞아 하동 횡천집으로 가기 위해 순천행 기차를 탔는데 대전 집으로 가고 있는 효임을 만나서 동석하게 됨에 감사합니다.

5. “고향집에 내려갈 때 대전을 지나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구경한 적이 없다”는 나의 말에 효임이 “그럼 한번 구경하고 가라”라는 말에 그길로 대전역에서 내려 중앙시장에서 포목상을 경영하시던 장모님께 인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6. 사윗감이 왔다고 좋아하시면서 하룻밤 묵고가라고 하여 “그러겠습니다.”고 말씀드린 후에 인동에 있는 효임 집에 가서 짐을 풀고 포목상에서 장모님 장사를 돕고 효임과 함께 후일의 처가댁에서 일박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7. 그 날 저녁에 내가 좋아한다고 수수부꾸미를 손수 부쳐주신 장모님과 효임 가족에게 감사하고, 다음 날 아침에 장인어른께서 아침 6시에 보문산에 냉수마찰하러 가자고 하시어 동행하였음에 감사합니다.

8. 장인어른께서 바둑이 6급 실력이시라 13급정도였던 제가 7점을 놓고 바둑을 배우게 됨에 감사하며, 1973년에 제가 1급이 되어서는 제게 7점 접바둑을 두었음에 감사합니다.

9.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하룻밤을 처가에서 지내면서 그로부터 아주 가까워지게 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0. 성신여자대학교 입구에서 처형과 자취를 하고 있는 효임 집이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서 하숙하고 있던 나의 집과 가까워서 자주 데이트를 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1. 196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처가에서 약혼식을 갖도록 해주어 감사합니다.

12. 장모님께서 “1970년 1월 10일에 결혼하면 말년이 더 좋다”고 말씀해 주셔서 횡천 어머님께 전보로 이 사실을 통지하고 승낙을 받아 1월 10일에 대전예식장에서 혼례식을 올리고서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된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3. ‘결혼식 날 눈이 오면 부부의 말년 운이 좋다’는데 폭설로 고속도로가 막혀서 결혼식을 마치고 서울에서 오신 하객(친지 및 지도교수님과 서울대 음대동창들)과 함께 유성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부산 해운대의 관광호텔에서 1박, 진주에서 1박한 후에, 하동 횡천 동구 밖에서 가마를 타고 집에 들어가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전통혼례식을 다시 한 번 올린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4. 혼례를 치르고 횡천 고향집에 있는데 사병징집통지서가 날아와 효임이가 혼비백산하였는데, 마침 이 때에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육사교수요원인 특수간부후보생(특간) 선발공고가 나서 효임이가 태능에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특간선발원서를 받아와 육사에 접수할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직접 수행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5. 효임의 정성으로 육사간부 후보생으로 선발이 되어 대학원 재학 중인 1970년 3월부터 1972년 2월까지 징집이 연기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에 훈련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되어 육사 교수부 법학과에서 육사 제29기부터 제35기의 생도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마련해 준 효임께 감사합니다.

16. 1972년 2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5월 5일부터 논산훈련소에서 6주, 광주보병학교에서 10주 합계 4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후에 1972년 9월 1일부터 1975년 8월 31일까지 만 3년간의 군복무를 하는 동안 뒷바라지에 성심을 다한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17. 지금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1남(대학 1학년) 1녀(대학 4학년)의 아버지인 아들 병준(고대 법대 89학번)과 2남(대학 3학년과 대학 1학년) 1녀(고교 2학년)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시부모 봉양에 성심인 딸 수진(고대 독문과 91학번)을 얻었음에 감사합니다.

18. 육사 전임강사로서 재직한 3년 동안 2만2천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서 친구들과 사교하는 비용으로 쓰고, 그 당시에 용문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한 효임은 5만8천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서 가사비용으로 충당하여 준 효임께 감사합니다.

19. “온 가족이 함께 하지 않으면 유학은 못 간다.”고 고집하여  가족비자가 나오는 유학의 길을 찾고 있던 중에, 독일의 콘라드아데나워 재단의 한국에서의 장학생 선발 1기로 합격하여 온 가족이 함께 독일 유학을 가게 된 계기를 갖게 하여 준 효임의 가족사랑에 감사합니다.

20. 나는 어학시험 준비과정을 밟기 위해 1977년 9월 초에 먼저 독일 튜빙엔으로 간 후에 병준, 수진이와 함께 집을 매매하고, 엄마의 위암수술 뒷바라지를 하고, 가사도구를 횡천 집으로 이사하는 등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말끔히 정리하고 1978년 1월 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독일생활 첫 발을 내딛던 효임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맞이하게 해 준 효임의 노력에 감사합니다.

21. 1978년 1월 1일에 생애 최초로 만리 이국땅 독일에 온 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구정을 맞이하여 튀빙엔대학 유학생과 간호사들을 비롯한 한인들을 모두 기숙사에 초대하여 만두를 빚고 떡국을 끊여 대접한 효임의 정성에 감사합니다.

22. 1977년 9월부터 1983년 8월까지 만 6년간 독일 튜빙엔대학교에서 나는 법학을, 효임은 음악학을 전공하면서 병준은 초등학교 2학년에서 4학년 졸업(독일 초등학교는 4년임)하고,  김나지움을 2년간 다니고, 수진은 유치원 2년과 초등학교 전 과정인 4년을 다닐 때에 우리 온 가족의 뒷바라지를 도맡아준 효임께 감사합니다.

23. 독일 튜빙엔대학의 학생기숙사인 발트호이저 오스트(Walthuserost)에 위치한 방3칸짜리 가족기숙사에서 독일 생활을 시작할 때에, 나는 공부에 전념하도록 병준과 수진의 학교입학, 병원치료 등  정착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맡아 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4. 자신도 음악학 공부를 하면서도 나의 박사학위 논문의 타이핑(그 때에는 PC가 발명되지 않았음)을 도와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5. 유학 중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이신 쬘르너(Wolfgang Zllner) 선생님 댁에 초대받아 갔을 때에,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로 병준은 풀룻, 수진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효임은 노래를 부르면서 선생님 내외분(선생님은 슬하에 자녀가 없으심)과 함께 맛있게 손수 구우신 선생님가문의 전통 크리스마스 쿠키와 케이크를 대접받으며 즐거운 송년을 맞이할 때에, 항상 그 중심에 서 있었던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6. 튀빙엔 유학 6년 중에 주말에는 홀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집으로 식사에 초대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면서 고향을 떠나 공부하는 학생들의 마음의 휴식공간을 마련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7. 튀빙엔대학 학생식당(Mensa)의 총책임자 하르틀(Hartle)씨의 두 딸(Sonya, Nina)의 피아노 렛슨을 한 효임의 인연으로 배추 반접을 주말에 넓은 식당공간에서 절여 김장을 해서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아 홀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8. 1979년 여름 방학 중에는 튜빙엔에서 25km 떨어진 로이틀링엔(Reutlingen)시의 보슈(Bosch)회사에서 나와 함께 4주간 아르바이트를 하여 유학 중에 부족한 가용돈을 마련하는데 협조하여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29. 새벽 3시에 일어나는 나의 취침습관으로 방학을 맞이하여, “오늘은 파리를 다녀올까”, “오늘은 로마여행을 가지”, “오늘은 비엔나의 박물관을 구경갈까”라고 하면서 병준, 수진도 깨우고하여 여행준비를 하자는 나의 얘기에 긍정의 자세로 함께 여행 준비를 하여 5시쯤 집을 떠날 수 있게 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0. 고려대 법대 고 이윤영 지도교수님과 서울대 법대 고 정희철 석사지도교수님을 비롯하여 당시의 한국의 법학자 손주찬 교수님 내외분, 계희열 교수님, 고 강빙구 교수님, 송상현 교수님, 및 법조계 인사들을 비좁은 학생기숙사의 아이들 방에서 묵으시게 하고 한국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며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를 68회나 모시고 구경을 시켜드리도록 도와준 효임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31. 일본 동경대학 이와하라 교수 등의 외지의 방문손님들을 위해 튀빙엔의 아름다운 베벤하우젠(Bebenhausen)국립공원에서 한국의 불고기 바비큐를 대접한 효임의 손님접대에 감사합니다. 

32.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효임은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길에 오를 때에, 병준과 수진의 학교 입학문제로 나보다 앞서 1983년 8월 20일에 귀국길에 올라서 서울에서의 우리 가족의 생활 터전을 마련하느라 애쓴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3. 1984년 3월에 나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부교수로, 효임은 서울교육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교직의 첫 발을 내딛고 정년까지 행복으로 함께 동행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4. 나와 효임이 대학교수로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  연탄난방을 하던 18평 미아리아파트에서 강남 대치동에 소재한 30평의 청실아파트로, 3년 후에 4명의 가족에게 각각의 독립된 생활공간을 갖게 하기 위하여 단지 내의 38평 아파트로 이사하여, 8년 동안 병준과 수진을 강남에서 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도록 뒷바라지 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5. 대치동에서 8년간 살고 난 후에 신도시 분당에 아파트 분양신청을 하여 서현동에 있는 한양아파트로 1992년에 이사하여 2000년까지 8년 동안 생활하면서 1994년에 병준을, 1995년에 수진을 결혼시켜 새로운 가정을 이루도록 온 정성을 기울여 온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6. 1992년 7월부터 나는 학생처장으로서 고려대학교 전체 학생을 돌보는 일을 맡았고 곧바로 1994년부터는 기획처장직을 수행하면서 고려대학교의 살림과 홍보의 책임자로 일하는 3년 동안 집안일을 효임 혼자서 관리하면서 애들 혼사까지 마친 효임의 가족사랑에 감사합니다.

37. 연암문화재단의 교수 해외 연수비를 지원받아 1995년 7월부터 1996년 2월 말까지 Harvard Law School의 방문교수로 Harvard에 갈 때에 효임도 Music Department의 교환교수로 있게 되어 함께 동행하여 Revere Beach에서 대서양에서 뜨는 해를 보며 발코니에서 커피와 함께 조찬을 준비해 주고 저녁에는 해변으로 쏟아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계획하면서 행복한 미국생활을 함께 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8. 우리 부부는 교수라는 같은 직업을 가졌기에 1977년부터 1995년 봄까지는 독일의 튜빙엔, 뮌헨, 마인쯔, 마르부르크 대학 등에서 1년간, 6개월간 혹은 방학기간에는 1개월~2개월 간 머물면서 연구자료 수집 및 교수들과 학술교류를 하였으며, 1995년 Harvard 생활 이후에는 1996년 겨울방학부터 2008년 내가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기 직전인 2008년 2월의 기간에는 Wisconsin-Medison Law School 교환교수로서 6개월, 2개월 등 머물 때에도 항상 동행하여 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39. 서울대 석사지도 교수셨던 고 정희철 선생님은 슬하에 자녀가 없으셔서 회갑을 맞이하여 독일 튀빙엔 우리집에 오셔서 10여일간 머무셨고, 우리 내외가 하바드대학 방문교수로 있던 1995년 가을에는 보스턴 주변의 골프장을 매일 번갈아 가며 10여일간을 모셨고, 2000년도에 귀국하시어 호텔에 기거하시는 것을 보고 남양주 우리 집에 1개월을 모시는 동안 은사님 내외분을 언제나 시부모 모시듯 정성을 다해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40. 새천년이 시작하는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 나는 고려대학교 제15대 총장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제15대 총장선거가 2번, 제16대 총장선거 그 사이에 변고가 생겨 총장서리가 각 1년씩 2번, 그리고 제17대 총장선거가 2008년 2월에 치러졌고, 6년 만에 4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전력으로 뒷받침해 준 효임의 후원으로 1월 17일에 고려대학교 제17대 총장으로 이사회에서 선임되고 2월 1일에 총장으로 취임할 때에 함께 하여 준 효임께 감사합니다.

41.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2011년 2월 말에 정년퇴임하면서 사임하고 3월 4일에 Washington D.C.에 소재한 George Washington 대학에 객원석좌교수로 1년간 연구하러 갈 때에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직을 1년간 휴직하도록 절차를 밟고 동행하여 준 효임의 결단에 감사합니다.

42. 3월 중순경에 이용훈 대법원장 측으로부터 4월 27일부터 대법원 양형위원장 위촉의 의사가 Washington에 있는 우리 부부에게 전달되었을 때에 “4년간의 총장직 임기를 마치지 않고 정년하면서 3년 1개월만 총장직을 수행하니, 대법원 양형위원장으로 일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니, 당신은 참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다”고 하면서 행복해 하던 효임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감사합니다.

43. 4월 27일에 대법원 양형위원회 제3기 위원장을 위촉받고 4번이나 서울과 Washington을 왕복하는 일정을 소화하다가 8월에 접어들어 Washington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1년간 휴직을 허가 받을 때에 계약이 취소된 의료보험 등을 되찾는 부수된 일들을 말끔히 처리하여 준 효임의 뛰어난 사회생활능력에 감사합니다.

44, 2012-13회기에 국제라이온스협회354-C지구 총재를 맡아 봉사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효임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45. 나는 2011년 2월 말에, 효임은 2013년 8월 말에 정년퇴임을 한 후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2014년 2월에 14년간 살던 남양주를 떠나서, 내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와의 인연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성북구 낙산길에 아들가족은 11층에, 우리 내외는 12층에서 3대가 함께 기거할 수 있는 생활공간을 마련하여 준 효임의 현명한 맹모삼천지교에 감사합니다. 

46. 1994년에 병준이 장가가고, 1995년에 수진이 시집을 가고 난 후에 우리 부부만 둘이서 함께 산 지난 24년간 해독주스를 비롯하여 건강한 아침식단을 정성스레 챙겨주고, 출타할 때에 양복과 넥타이 등 나의 드레스 코딩을 해주는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47. 2017년 들어서서 (사)대한중재인협회의 협회장을 맡아서 협회를 산업자원부에서 법무부로 이관하고, 무역센터 17층에 독립된 사무실로 이전하고, 법정기부금단체로 지정받는 등의 협회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국내 및 국제세미나 개최 등의 사업을 수행함에 함께 도와준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48. 4~5번 척추관 협착증으로 2017년부터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 수영하라고 Hilton 호텔의 Health Club 회원권을 끊어주고 5월 10일부터 함께 수영하고 운동하며, 집 옆에 있는 낙산공원을 함께 산책하며 나의 건강을 위해 애쓰는 효임께 감사합니다.

49. 아침 7시 30분경 며늘아이가 챙겨준 아침식사를 들고 잠옷차림으로 윗층으로 올라와 우리 내외와 효임이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여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조찬을 하며 일과를 논의하고, 각각 좋아하는 식당가를 섭렵하는 주말 가족모임을 가져 자식들의 효도를 이끌어주는 효임에게 감사합니다. 

50. 결혼 49주년인 2019년 1월 10일을 맞는 이 시점에서 엄마가 나를 돌봐 준 24년보다 두 배가 넘는 49년이라는 기간 동안 친구 좋아서, 술이 좋아서, 술 마시는 분위기에 취해서 새벽녘에나 귀가하는 나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약서를 5번이나 쓰게 하면서도 망나니이고 철부지인 나를 가꾸고 격려하여 오늘의 이기수로 인격성장을 이루어 낸 효임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효임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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