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가족이 만든 기적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며 가장 미안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가족들. 하지만 그 가족들의 힘으로 다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기업에서 알게 된 감사
2012년 포스코의 데이터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네오디에스라는 회사가 출범했습니다. 당시 대표였던 양창곡 님은 사훈을 ‘감사를 생활화 하자’로 정하고는 감사헤브루타(Thanks Hevruta)를 펼치며 사내에 감사의 숨결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무렵 네오디에스 이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해섭 님이 계십니다. 회사에서 시작된 감사운동을 기쁘게 받아들인 박해섭 님은 당시 따님인 박하은 양에게 100감사를 썼습니다. 일부만 소개해드립니다.

“- 네가 태어나던 날 엄마는 몹시 아파했고, 아빠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너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하나님께 감사했고, 딸로 태어나 준 너에게 감사하다.

- 이성 친구로 힘들어 하는 줄도 모르고 늦게 들어온다고 화냈을 때도 그 다음 날이면 웃는 얼굴로 아빠를 쳐다봐 줘서 감사하다.

- 지금 생각해 보니 딸에 대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동안 너무도 부족한 아빠를 아빠라고 불러준 것 또한 너무도 감사하구나.”

아빠의 감사 편지를 받은 딸도 아빠에게 100감사를 썼습니다. 일부만 소개해드립니다.

“- 제일 먼저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신 우리 아빠께 감사해요~ 엄마, 아빠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겠지?

- 어릴 때 엄마한테 야단맞고 방에 들어가 혼자 울고 있던 내 곁에 살며시 들어와 따뜻한 위로와 용돈 주셨던 거 감사해요. 그때는 정말 ‘우리 아빠는 천사인 게 분명해.’ 이런 생각도 하곤 했다니깐~? ㅎㅎ

- 어떤 상황이 오던 내가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게 지켜봐주셔서 감사해요~ㅎㅎ

- 건강하게 내 곁을 지켜주는 아빠 감사해!”

아빠의 100감사를 받고 좋아하는 딸을 본 엄마와 아들은 아빠에게 100감사를 요청했고, 박해섭 님은 기꺼이 100감사를 써주었습니다.

딸에게서 100감사를 받은 박해섭 님은 “딸에 대한 신뢰가 생겨 어디를 가든 불안감 대신에 잘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고 말했고, 아내에게 100감사를 써준 뒤에는 “부부 사이도 전보다 좋아졌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가정으로 번진 감사
기업 문화로 시작된 감사가 가족에게도 번져 전보다 더 행복 넘치는 가정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박해섭 님의 장모님에게까지 100감사가 전달되었습니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아내에게 쓴 게 아니라 장모님에게 100감사를 썼다는 것,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따듯합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해드립니다.

- “제가 장모님의 딸과 결혼한 지 벌써 24번째 해를 맞이하였고, 장모님께서 낳아 주시고 길러주시며 지금까지도 걱정해 주시는 딸이 벌써 51번째 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부족한 사위가 딸의 생일을 기념하여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 장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병환을 간호하시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자식들 키우시며 꿋꿋하게 살아주신 장모님 감사합니다.

- 병원에 가실 때에 교통편이 없어서 저에게 부탁하시려다가 출근해야 하는 저를 걱정하시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출근하라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이 사연을 본 KBS1 텔레비전 시니어 토크쇼 ‘황금연못’의 작가가 감사나눔신문으로 전화를 걸어 “100감사 내용이 너무나 진솔하고 감동적이어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사위가 감사편지와 꽃다발을 가지고 깜짝 출연해 장모님에게 전달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분을 우리 스튜디오로 꼭 모시고 싶습니다”라며 섭외를 했습니다. 하지만 박해섭 님과 장모님은 방송에 출연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섭 님은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마를 이겨준 감사
가족은 물론 사내 임직원들에게도 100감사를 여러 번 쓴 박해섭 님은 당시 감사가 가져다준 변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스스로는 100감사와 감사일기를 통해 조급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남을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각이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가족들, 특히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전과는 달리 남편에 대한 믿음이 커진 듯하고,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려고 한다. 딸은 나에게 100감사편지로 답장을 써줬고, 그로 인해 딸을 더 많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딸이 하는 모든 것을 믿게 되어 걱정이 사라졌다. 100감사는 나 자신과 가족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함께 행복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감사가 가져다준 행복도 잠시 2015년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 박해섭 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력을 이어받은 것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당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아직 가족들하고 이별할 시기도 아닌데…. 친구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우리 아이들한테는 또 어떻게 말하지…. 아들은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딸 역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또 마음 약한 아내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성실하게 살아온 박해섭 님은 모든 게 원망스러운 가운데 회사를 떠나 여동생이 구해준 산자락 펜션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외롭고 고통스럽고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박해섭 님은 문득 오프라 윈프리의 5감사가 생각났습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해왔던 감사의 저력으로 박해섭 님은 산책길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를 되뇌었습니다. 지금 살아 맑은 공기로 숨을 쉬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100감사를 써줘야 할 사람이 많은데, 이대로 그것을 멈춰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2년이 흐른 어느 날 치료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를 하고 CT촬영을 하였는데, 진단을 하던 의사가 놀랐습니다. 암덩어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실한 삶 그대로 감사로 성실하게 투병생활을 한 박해섭 님에게 너무도 기쁜 소식었습니다.

2012년 네오디에스에 감사를 도입했던 양창곡 전 대표(가운데)와 이때 감사를 알게 된 뒤 췌장암을 감사로 극복해낸 박해섭 님(오른쪽)이 감사나눔신문사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인생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떤 사연을 소개할까 하다가 감사로 병마를 이겨낸 박해섭 님이 떠올랐습니다. 감사 가족의 힘으로 어려운 시간을 극복해낸 박해섭 님의 근황을 묻자 그가 그동안의 과정을 글로 정리해 보내주셨습니다. 소개해드립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용문 근처 숲속 조그만 펜션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의사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시한부 생활을 하며 계속되는 항암치료에 몸은 점점 더 지쳐갔다. 그곳에 있으면서 갑작스런 고열과 통증으로 인하여 몇 차례 응급실에 갔고 항암 치료로 인하여 몸은 더욱 힘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때문이라도 나는 꼭 살아서 이겨내야 된다는 마음뿐이었다.

항암주사 12번을 맞으며 온 몸은 힘이 빠졌고 입안은 헐어서 간이 조금이라도 된 음식은 먹지를 못하였다. 겨우 먹을 수 있는 것은 도토리묵 하고 간이 전혀 안 된 죽 같은 음식만을 섭취하였다. 그래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걷고 또 걸으며 한 발짝 내디딜 때마가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되뇌며 걸었다.

하루 일과가 걷는 것이었다. 책을 볼 수도 없었다. 아니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힘이 들었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를 짓는 것만 같아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길을 나서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이 들었지만 꼭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아이들을 볼 수 있고 아내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를 되뇌었다.

그러나 췌장암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약물치료를 12차례 받았는데도 차도가 없어 수술조차도 못하였고 지쳐가는 나의 몸 상태를 보신 담당 교수님은 이젠 항암주사는 접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보자고 하였다. 

25회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어느덧 이듬해 봄 4월 나의 생일을 맞이하였다. 딸이 사귀고 있는 해외 친구들과 국내에 있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힘낼 수 있게 위로해 달라는 부탁을 한 모양이다. 친구들 모두가 나의 자식 같았다.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외국 친구들은 ‘Happy birthday to you! don’t give up!’ 생일축하 노래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한국 친구들은 ‘아버님 힘내세요. 생신 축하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라며 위로의 메시지를 영상으로 편집하여 보내왔다. 얼마나 고마운지 감동이 되어 눈물을 한없이 쏟았다. 정말 힘이 되었다.

주위에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기도의 힘으로 투병생활은 계속되었고, 얼마 후에 혈액검사와 영상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갔을 때였다. 담당 교수님의 말씀은 정말이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췌장에 암덩어리가 보이질 않네요!’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그러면 제가 다 나은 것인가요?’ 되물었다. 하지만 담당 교수님의 대답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혈액 검사 결과도 아주 양호하고 CT촬영 결과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아직 치료가 됐다고 판단할 수는 없으니 3개월 후에 다시 검사하자’고 하였다.

3개월 후에 다시 검사하였고 결과는 마찬가지로 아주 양호하다는 것이다. 이젠 6개월마다 검사를 받고 있다. 지난 1월에도 받았다. 결과는 아주 좋다. 하지만 아직은 후유증이 남아있어 몸무게가 많이 빠져 있는 상태이고 힘은 예전처럼 없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이젠 정말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누구보다 감사운동을 열심히 했던 감사맨으로 박해섭 님을 기억하는 양창곡 님도 이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한 말씀 부탁드렸습니다. “박해섭 이사가 완쾌되었다는데 감사드리며, 또한 그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박 이사의 감사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음에도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감사로 맺어진 크고 작은 인연들, 5월의 각 가정을 더욱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서정 기자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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