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박사님

조 순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든 칼리지 및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한국 국제 경제학회 초대 회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0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했다. 대한민국의 대표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사진제공 = 매경이코노미>

인연을 되새기며 
‘선행막선어감사(善行莫先於感謝)’
“선행이 감사를 앞설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모든 삶의 근본은 감사이기에 감사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선행을 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한자말이기에 어느 고전에 나오는 문구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한국 현대 경제학의 초석을 세운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직접 지은 문장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터득한 탁월한 지혜가 응축된 멋진 글입니다.

이 글이 담긴 족자가 감사나눔신문사 한 쪽 벽면을 빛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조순 박사는 겸손하게도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조순학파’라는 계보가 있을 정도인 한국 경제학계의 거두를 스승으로 둔 제갈정웅 이사장이 감사나눔신문에 몸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감사나눔을 펼치고 있는 제자에 대한 격려와 응원으로 건네준 ‘선행막선어감사’ 족자, 그걸 볼 때마다 스승의 사랑을 되새기곤 합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을 맞아 제갈 이사장이 지난 5월 10일 오후 3시경 평생의 스승이자 은인이신 조순 박사를 찾아뵈었습니다.

오늘의 제자가 있기까지
특별한 일이나 행사가 아니면 외출을 거의 않는다고 하셔서 건강을 여쭈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딱히 병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계단 오르는 게 힘듭니다.”

그런데도 봉천동 언덕길에 있는 집을 떠나지 않는 연유가 궁금했지만, 91세의 나이에 또 어딘가로 가시느냐고 묻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럼 먼저 조순 박사와 제갈정웅 이사장의 인연에 대해 제갈 이사장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조순 박사님은 고향,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님이십니다. 조 박사님이 장위동에 사실 때인 대학 4학년 때는 제가 조 박사님 셋째 자제분의 공부 지도를 1년 정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1974년 12월 8일 결혼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한때 경제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조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생 동안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서 책 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 연유로 경제학 공부 대신 당시 들어가기 힘들었던 한국외환은행 입사를 희망했습니다. 운 좋게도 무시험으로 입행이 결정되어 그 소식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러자 조 박사님은 너무도 좋아하시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습니다.

대학 때 기억에 남는 것 몇 개 더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복학하고 난 뒤의 일입니다. 서울상대 평론집에 ‘공자의 경제이념’이라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논어에서 공자의 경제이념을 찾아서 논문을 쓴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크게 기뻐하며 칭찬해주셨습니다.

다음으로 대학 3학년 때의 일입니다. 학생대표인 학생회장이 일본에 가야 하는데 사정상 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대의원 의장을 하고 있던 제가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군 입대 전인 1966년 법대도서관에서 일주일 단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단식 마지막 날 검지를 이빨로 물어뜯고는 혈서를 썼습니다. 이 기록이 남아 있어 정보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는 걸 조 박사님이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졸업하고 나서 취업을 해도 해외에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을 다녀오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국 학생대표로 일본 학생대표들과 후지산 중턱에 있던 고덴바의 호텔에 가서 열띤 토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졸업 후 한국외환은행에 다니던 무렵이었습니다. 조 박사님을 찾아갔습니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조 박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회계사가 되어 개업을 할 것입니까?’

저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조 박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은행에 그냥 다닐 것이면 에너지 분산하지 말고 맡은 은행 일을 잘 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서 한국외환은행 누구하면 그 업무에서 그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씀에 공감해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영대학원 야간 반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 박사님을 찾아가 의논드리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행장들이 석사나 박사가 아닙니다. 은행 업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들입니다. 지식이 많아서 소위 출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심 어린 충고의 말씀을 듣고는 잡념 없이 한국외환은행에서 맡은 컴퓨터 개발 업무에 매진했습니다. 그러고는 업무에 필요한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결과 1973년에 3개월 동안, 1975년에 6개월 동안 일본에서 온라인 리얼타임 뱅킹 시스템을 개발하는 교육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국외환은행에 근무했던 5년 반 동안 2000여 명 전체 행원 가운데 근무 평가인 고과가 95점이 넘어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게 조 박사님의 제자 사랑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면 늘 콧노래를 부르며 신바람 나게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은행계>라는 잡지에 컴퓨터로 업무 개발을 한 것에 대한 관련 지식들을 정리하여 매월 1년간 연재했던 것입니다. 데이터 커뮤니케이션(Data Communication)에 대한 글이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정보학회지의 창립 편집위원이 되었습니다. 데이터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테크니컬 페이퍼는 지금의 5G 통신의 첫 단계인 1G 통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 박사님의 조언대로 한곳에 몰입하며 컴퓨터 교육을 받고 통신에 관한 글을 게재했던 것이 나중에 대림산업에 컴퓨터 전문가로 스카우트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림그룹에 IBM 370을 도입하고 전산화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해외 현장에도 컴퓨터를 도입하게 했습니다.

그후 대림그룹에 대림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하고 8년 반을 대표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기로에서 조 박사님의 큰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의 삶도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조 박사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행막선어감사’를 쓰고 있는 조순 박사(왼쪽). 조순 박사가 요즘 관심 깊게 보고 있는 ‘Science in Traditional: A comparative Perspective’ 표지.(오른쪽)

여전히 격려를 주시며
지난날을 회고하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감사함을 갖고서 최근 집중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중국의 과학 기술에 대한 책 <Science in Traditional China : A Comparative Perspective >를 읽고 있습니다. 저자의 중국과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깊어 보여요.”

그래서 조심스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5년 전에 칠순 기념으로 중국을 70일 동안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면서 중국을 보는 키워드 여섯 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광장고대다융’입니다.”

조순 박사가 계속 경청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트런드 러셀도 헨리 키신저도 닉슨 전 미국 대통령도 중국에 높은 신뢰를 보냈고, 중국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보았습니다. 저도 물론 그렇게 보고 있고요.”

그 말씀에 제갈 이사장은 중국 배낭여행에서 얻은 ‘광장고대다융’에 다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여전히 제자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주시는 조 박사님에게 또 깊이 감사를 전했습니다.

 

모든 게 고마워요
27년째 한 집에 살고 계시는 봉천동 조순 박사의 자택을 나서며 마당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문득 은행나무와 관련된 조순 박사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옮겨보겠습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의 서울대 건물들은 천편일률로 성냥갑 같은 4층 건물이었다. 그래서 학교의 모양은 똑같은 규격의 기차가 무질서하게 들어선 기차 정거장과 같았다. 황량한 건물 주변에 부랴부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내가 학장을 맡은 사회과학대학 7동 앞에는 은행나무가 들어섰다. 그 중 한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월등히 컸는데, 굵은 가지가 다 잘려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음해 봄이 오니 은행나무들은 고운 잎을 피웠다. 그러나 가장 큰 그 나무에서는 전혀 잎이 나오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도 그 나무껍질은 거무스름하게 말라가기만 했다. 나는 학장회의에서 제발 빨리 그 나무를 뽑아가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사무국장의 말은 달랐다. 그 나무는 심은 사람이 와서 뽑아가야 다른 나무로 교체할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해 봄에도 그 나무는 살아나지 않았다. 나무를 뽑아가야 할 사람도 오지 않았다. 다른 나무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 나무의 흉물스러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 그 나무에서 움이 돋기 시작했다. 그 움은 다른 나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굵었고, 검푸르고 두꺼운 잎은 싱싱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광경이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시체가 관 뚜껑을 제치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일갈하는 모습이었다. 거의 2년 동안 그 나무는 잔뿌리를 새로 내려서 영양을 껍질 밑에 비축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빨리 뽑아가라고 다그친 내가 부끄럽기만 했다. 그 나무 앞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사과했다. 

‘내가 너로부터 많이 배웠다. 은행나무야, 미안하고 고맙구나.’”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스승은 또 제자로부터 배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니 모두가 스승이고 모두가 제자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 시절 한 사람의 멋진 인생을 만들어준 우리 시대의 스승 조순 박사, 영원히 감사합니다. 

 

김서정 기자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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