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내는 소아마비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한 북한 사회에서 그녀는 늘 외톨이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목발을 짚고도 거동이 어려운데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은 거의 전무했기에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집안에서만 웅크리고 지내왔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명절날이었다. 남들은 나들이도 가고 명소에도 다니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자신만 집에 틀어박혀 홀로 지내는 게 너무나 싫었다. ‘나는 왜 이런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불행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비관에 잠긴 적도 많았다. 이따금은 절망에 허우적대다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33살에 6살 연하인 그를 만났다. 중매로 처음 만난 날 이후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매일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녀 또한 순박하고 든든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은 사내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의 영원한 길동무가 되어 주리라 마음먹은 남과 여는 만난 지 25일 만에 화촉을 밝혔다.      

아내의 다리가 되다
그녀의 삶은 그를 만난 이후 180도로 변했다. 늘 갈망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많은 것들이 그녀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그는 그녀가 가고 싶었던 곳, 다니고 싶었던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 주었다. 넓은 등판에 아기를 업듯이 아내를 업고서 묵묵히 그녀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냥 행복했다.
첫 데이트 때는 아내를 업고 김일성 부자 동상에 갔다. 북에선 결혼식 등 좋은 일이 있으면 김부자 동상을 찾는 게 풍습이다. 몸이 불편했기에 한 번도 찾아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아내를 위해 동상을 방문했을 때 기쁨으로 피어나던 그녀의 환한 얼굴은 그에게 또 다른 빛이 되었다. 
그 후 그와 아내는 어디를 가든, 말 그대로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그녀가 원하는 곳이라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압록강과 붙어있는 북한의 북쪽 끝 ‘양강도’였지만 그녀를 위해 먼 길을 달려 평양의 문수물놀이장과 개선청년공원 등도 해마다 다녔다. 

평양 시내를 다닐 때는, 유난히 깊은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데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평양 지하철의 수많은 계단을 아내를 업은 채 걸어서 오르내렸다. 
그들은 김일성 생가 근처에 위치한 만경봉에도 올랐다. 그곳은 정상인도 제 한 몸 건사하며 오르기 힘든 곳이다. 그의 아내는 어릴 때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몸이 불편했기에 엄두도 내지 못했고 부모형제들조차 한 번도 데려가주지 못했었다고 했다. 수 십 미터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만경봉에 가는 길. 그는 아내를 위해 한 계단 한 계단씩 묵묵히 올랐다.

아내를 업고 백두산에 오르다
부부는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도 함께 올랐다. 백두산은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걸쳐 있는데 중국 쪽 루트로 오를 때는 관광버스가 정상 부근까지 운행하므로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쪽 루트는 사정이 다르다. 버스를 타고 백두산 입구에 도착한 부부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난감함에 빠졌다.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가 있기는 했지만 전력수급 상황이 좋지 못하기에 당 간부 등이 왔을 때만 운행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어쩔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했지만 아내에게 천지의 장엄한 풍광을 꼭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한여름의 폭염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아내를 등에 업고 팥죽 같은 땀을 뚝뚝 흘리며 몇 시간을 걸어 결국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푸르고 맑은 천지를 배경으로 아내와 사진을 찍으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힘들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하루하루를 엮어가던 가정에 어느 날 시련이 찾아왔다. 아내의 가게에 진 외상값을 차일피일 미루던 한 남자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가 쇠몽둥이로 내리쳐 아내의 팔을 부러뜨리는 사단이 난 것이다. 아내는 골절 수술 후 보름 만에 퇴원하여 법의 심판을 요구했다. 하지만 가해자로부터 이미 뇌물을 받아 챙긴 법관은 부부의 호소를 무시하고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하려고만 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장애를 가진 점을 악용해, 스스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 팔이 부러진 거라는 파렴치한 주장을 해댔다. 아내는 너무나 억울했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절망했다. 더는 이 썩어빠진 곳에서 살 수 없다고 마음먹었지만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 탈북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목숨을 건 탈북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어떤 고난과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던 그는 탈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튼튼한 어른용 포대기를 맞춤형으로 주문 제작했다. 그것은 걸을 수 없는 아내를 데리고 세 식구가 함께 강을 건너기 위한 필수장비였다. 
여러 날에 걸쳐 주변정리를 마친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밤, 포대기로 감싼 아내를 업고  어린 딸의 손을 잡아끌며 압록강으로 향했다. 
깊은 밤의 강물은 차고 거셌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헤치며 세 식구는 한 몸이 되어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강물에 휩쓸릴 수 있는 아찔한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아내와 딸을 이끌고 무사히 중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탈북의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북한 당국의 추격을 피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가야하는 험난한 행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오스의 험준한 산을 넘어
그중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라오스의 험준한 산을 넘어 태국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열대우림이 사방으로 뻗은 산길을 그는 아내를 등에 업은 채 쉼 없이 걸었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산길에서 이따금 발을 헛디딜 때면 포대기에 싸인 채 자신과 한 몸이 되어 있는 아내도 함께 흙구덩이를 구를 수밖에 없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풀숲을 헤치며 그 험한 산을 넘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는 이렇게 굳게 마음먹었다고 한다. ‘내가 택한 길이니까 끝까지 가야 한다. 이 길을 넘지 못하면 죽는 길 뿐이다. 모든 걸 참고 견디자.’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훔치며 네 시간 넘게 산을 오른 끝에 간신히 내리막에 도달했다. 
하지만 하산 길은 더 위험했다. 팔까지 다친 아내가 혹시라도 상할까 걱정되어 한 발 한 발을 조심스레 떼었지만 수십 차례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라오스의 험한 산들을 아내를 등에 업고 딸을 독려하며 그는 이를 악물고 기어이 넘었다.
그리고 목숨을 건 탈북 후 수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그들 가족은 결국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남한에 안착해 살아본 소감에 대해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을 위한 아무런 시설도 없는 북한 땅에 살다가, 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세심하게 관리되는 수많은 시설을 갖춘 남한에서 살아보니 매일 매일이 감사할 뿐이에요.”
누군가를 등에 업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기도 아닌 어른을 등에 업고 걷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가를. 몇 발자국만 걸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밑에까지 차오른다. 그런데 아내를 업고서 백두산에 오르고, 압록강을 건너고 라오스 산을 넘어 탈북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소설의 제목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 탈북자 전영철 씨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으로 빚어진 가족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새삼 뜨겁게 느껴본다.
김덕호 기자

<이 글은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온 사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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