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점

74회 광복절을 맞은 오늘날에도 이시영 선생의 커다란 발자취는 여전히 빛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기득권층의 이러한 솔선수범은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특히 빛을 발했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74회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는 ‘금수저’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배우고 본받으며 따를 ‘참 어른’이 귀한 이 시대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 분의 뜨거운 삶은 더욱 고귀하게 다가옵니다.

 

50여명의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이시영 선생은 조선 선조 때 명신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으로 그의 가문은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던 즈음에도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지닌 최고 명문가로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명문가의 7형제 중 다섯째인 선생은 형제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1885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는 20대에 당상관에 진입하는, 그야말로 초 엘리트 관료 코스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기 시작했고 그의 험로 또한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 일제는 을사조약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교섭국장으로 있던 선생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유약한 박제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 앞에 끝내 을사조약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이시영 선생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은 약혼한 상황이었는데, 을사조약 체결에 박제순이 동의하자 선생은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37세인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어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을 하다가 1907년에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어 한성으로 왔습니다.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습니다. 1907년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한일 병합이 이루어지고 나라는 명맥이 끊겼습니다. 그러자 이시영 선생을 비롯한 여섯 형제의 일가 50여명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이주하는 엄청난 선택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육진흥 및 독립군 양성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기관이 신흥무관학교입니다.

 

“내 재산 찾으려고 독립운동을 한게 아니오”
가산을 다 쏟아 부은 아낌없는 투자 덕에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해냈습니다. ​

하지만 아무리 이씨 가문의 재산이 많았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이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보다 더 기약 없는 일이었습니다. 1916년 선생의 부인 박씨가 과로로 쓰러져 숨을 거두고만 일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거부 중 하나였던 이씨 집안의 형제들은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또는 일제의 만행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 35년을 끝내 살아내고 일본의 패망을 본 건 다섯째 이시영 뿐이었습니다.

환국 시기에 칠순의 이시영 선생은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선생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 때 법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조직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고달픈 책무를 수행하던 와중에 이시영은 자신의 가족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건너올 때 그는 어린 아들들을 거의 버리고 오다시피 했고, 셋째와 넷째는 아버지가 임시정부를 따라 떠나자 만주에서 구걸하다 두 살, 세 살 때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둘째 아들 이규열 만은 가족을 모두 잃은 뒤 ‘상하이에 아버지가 있다’는 가냘픈 믿음 하나로 무작정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상하이로 가서 아버지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습니다. 

아무리 임시정부라지만 어쨌든 재무총장이면 재정을 담당하는 직책인데 그런 재무총장의 아들들이 비참하게 굶어 죽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독립운동의 외길만을 걸어온 이시영 선생의 성품이 미루어 짐작됩니다.  

해방이 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선생이 소유했던 옛 토지의 일부나마 되찾아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딱 잘라 대답했답니다. “내 재산 찾으려고 독립운동 한 게 아니오.”

1910년 말에 망명하여 1945년 11월에 환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현장마다 선생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독립운동 기간 동안 항상 목소리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입니다. 또 격렬한 투쟁의 현장에 나서거나 좌우 분화와 갈등의 길목에서 조용히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1953년에 서거하였고,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정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선생의 뜻과 공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시영 선생의 피와 땀에 머리 숙여 감사를 올립니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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