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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알면 삶이 보인다전세일 의학박사의 건강이야기
  • 전세일 의학박사
  • 승인 2019.08.30 11:01
  • 호수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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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체에 있어서 “살아가고 있음”과 “죽어가고 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고 있는 것이 생명체라는 말로도 된다. “살아가고 있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고 있는 과정은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다. 삶(life)과 죽음(death) 자체는 다른 것이지만, 살아가는 과정(living)과 죽어가는 과정(dying)은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말은 각 문화권마다 또는 각 민족마다 다소 다르게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 말의 “돌아가셨다”에 해당되는 영어는 “passed away(지나갔다)”라는 표현이다. 우리말에는“영혼이 어디에서 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는 뜻인데 비해, 영어권에서는 “영혼이 어디에선가 이리로 왔다가 다시 다른 데로 휙 지나가 버렸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하는 죽음의 원인에는 노쇠화, 질병, 외상, 자살, 그리고 안락사가 있다. 존 웹스터는“죽음에는 인간이 출구로 삼고 있는 수 만 개의 문이 있다”고 했고, 마리아 릴케는 “오 주여! 우리들 각자에게 알맞은 죽음을 주소서”라고 시로 읊었다.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길과 원인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양하다. 일반적인 죽음, 사회적인 죽음, 의학적인 죽음, 프로그램 된 죽음(apoptosis) 이 있다. 여기서 아포프토시스’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알아서 죽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죽음을 말한다. 세포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죽음과 만난 경험은 다양하며 여기에는 아름다운 죽음, 허무한 죽음, 슬픈 죽음, 수용하는 죽음, 담담한 죽음 등이 있다. 죽음의 문전에 갔다 돌아온 얘기는 오래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경험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믿을 만한 내용도 많고, 그러한 실례들을 과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한 시도를 통해, 정신의학적인 것에서부터 생화학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한 요인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종교적인 신앙이나 초심리학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실례들이 사후의 지상낙원을 경험하고 돌아온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윌리엄 오슬러는 5백 명의 임종을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5백 명 중 90명만이 고통이나 고뇌를 보였을 뿐 대다수 환자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 루이 토마스는 “일반적으로 죽음에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는 설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셔윈 누랜드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았다”고 반론을 펴기도 했다. 위대한 탐험가이며 의료선교사인 데이비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술했다. “이빨로 나를 물고 전후좌우로 흔들어 대는 사자의 머릿짓에 정신없이 온 몸이 흔들렸는데, 그 뒤로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감정은 사나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모든 동물들에게 존재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창조주께서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내리신 축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죽음에는 필연성이 뒤따른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는다. 아니 죽어야 한다. 즉 죽음으로써 새로이 교체되어야만 한다. 죽음의 손을 뿌리칠 수 있다는 환상은 인류 발전의 영속성과는 양립할 수 없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우리의 영생이 우리 자녀들의 권익과 양립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무릇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들에 있어서 때가 되어 그들이 죽음으로써 생의 무대를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죽음은, 이 세상을 자손들을 위해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삶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 과정인 것이다. 생에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은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즐거움과 성취감 그리고 고통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이 내린 한계를 억지로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틀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죽음을 직시할 때, 세상은 한층 더 빠르게 진보될 수 있고 시간은 더 없이 소중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그대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이고, 세상 삶의 일부분으로, 창조의 근원을 이룬다”고 했다. 그는 또 “철학 연구는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에세이집을 통해 “타인이 그대에게 자리를 내준 것처럼 그대 역시 타인에게 자리를 내주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죽음은 생명이 살기 위해서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말이다.
하나하나의 세포는 “낱 생명”이고 이러한 70조 개의 세포가 뭉쳐서 이루어진 우리 몸이 “온 생명”이다. 몸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세포는 계속 죽고 재생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한다. 세포들이 건강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어야 몸이 오래 동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낱 생명”인 사람 하나하나가 건강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어야 상대적 “온 생명”인 인류가 건강하게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건강하기 위해서 인간은 프로그램 된 대로 제때에 죽어야만 한다. 

사람은 이러한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왔고, 꾸준히 영생을 갈구해 왔다. ‘나’를 복제 해 놓음으로써 나의 흔적을 이 세상에 계속 유지시키려는 노력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는 큰 생명의 일부에 속함으로써 나도 계속 산다”는 생각이 가장 옳은 생각이며 진리 중의 진리라 할 수 있다.

전세일 의학박사  webmaster@www.gams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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