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를 읽고

 

소설 <강치>는 조선 숙종 때 사람 안용복이 4년 동안 바다 건너 일본을 두 번이나 다녀오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내려 피땀흘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안용복에 대하여 <성호사설>(1761년)에는 경상도 동래의 수군 출신으로 왜관에 출입하며 일본말을 익혔다고 되어 있다. 소설 속 지명이나 인명의 대부분은 <숙종실록>이나 이익의 <성호사설>등 우리나라의 자료를 비롯해 일본의 문헌 ‘죽도고’(1828년)와 2005년 일본 오키섬에서 발견된 안용복 조사보고서 등에 충실하게 근거하여 쓰여졌다. 

 

이야기는 1693년 4월 17일부터 시작된다.  두어 달 해산물을 말려서 부산으로 돌아가려던 안용복 일행은 중형급 군선까지 동원해 독도에 강치를 잡으러 온 세 척의 일본인 선단에 납치된다. 

안용복과 박어둔은 일본으로 납치 되어가던 도중에 칼에 찔린 업동이 죽자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는 참혹한 광영을 목격한다. 울릉도와 독도에 가지 말라고만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조선 사람을 납치해도 나라는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안용복은 절망한다. 일본에 도착한 안용복은 일본 사람들이 “땅이든, 바다이든 힘있는 자의 것이오.”라며 설득하려 하자 이렇게 쏘아붙인다. “나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내게 부당한 사실을 받아들이라 하니, 나로서는 그럴 수 없을 뿐이오” 또한 “조선 사람이 조선의 섬을 조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건, 곧 조선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소. 그건 곧 나의 뿌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오,” 라고 당당히 말한다.

일본에 도착한지 한달여 만인 1693년 6월 5일 안용복은 유창한 일본어와 빠른 정세 판단과 결단력으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 非日本界)’라는 막부의 쇼군의 서계를 받아내게 된다. 

쇼군의 서계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대나무 숲에서 쇼군과 조우하게 된 안용복은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대화를 나눈다.

“멀리 있는 섬 하나 때문에 양국이 분란에 휩싸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계도 써준 것이다.” “누구도 이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말라.”고 쇼군은 분명히 명령하였다. 하지만 그 명령은 통하지 않았다. 귀국길에 오른 안용복과 박어둔은 대마도를 경유했는데, 쇼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선 당시 독도에 엄청난 이권이 걸린 대마도 사람들은 쇼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이 목숨을 걸고 받아낸 서계를 강탈하고 선물까지 빼앗는다. 

간신히 고향에 돌아온 안용복은 국법을 어긴 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초향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살아난다. 그리고 유배되었다가 1694년 8월25일 안용복과 박어둔을 무죄 사면하고, 안용복을 즉시 방면하라는 왕명을 받고 사면 복권 되었다.

1694년 9월 15일 안용복은 유집일의 요청으로 울릉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조사하는 일을 도와주게 되고 군사를 주둔 시키면 사람들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섬이라는 생각을 한다. 

울릉도 조사를 하며 멀리 독도를 바라보며 “우리가 가면 그 서계를 다시 받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박어둔의 말을 들으며 안용복은 다시 한 차례 일본을 다녀올 운명 같다는 예감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번째 일본을 방문하여 지난번 대마도에서 빼앗긴 쇼군의 서계를 찾아올 계획을 세운다.

쓰시마번을 거치지 않고 첫번째 방문때 서계를 써준 돗토리번으로 가서 소송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정식 사신행세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났다. 통정대부 안용복. ‘1654년생. 동래거주’라는 호패가 만들어지고 <조울양도감세장 신안동지기>라는 깃발도 만들었다. 1696년 3월 18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지남철을 놓고 온 것처럼 속임수를 써서 어렵게 어둔을 떼어 놓고 일본으로 출발한다. 두 달간 항해하여 5월 18일 오키섬을 거처 6월 5일 본토인 돗토리 번주님께 상소할 것이 있어 온 조선 국왕의 사신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돗토리번의 번주는 만나기를 피했다. 게다가 외딴 섬에 갇혀서 음식물도 공급 받지 못하다가 조선 출신 게이샤 도화의 도움으로 간신히 휴가중인 번주를 뵙게된다. 

번주는 상소한 내용이 쇼군에게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대마도에 빼앗겼던 서계를 찾아 안용복 사신 일행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쓰시마나 나가사끼를 통할 필요 없이 바로 가라고 한다. 안용복은 나라를 어지럽게 한 것은 나 혼자뿐이며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기로 마음 먹는다. 

처음에 안용복을 납치했던 쿠로베가 다시 안용복 일행을 독도까지 따라와서 서계를 탈취하려 하나 이번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안용복은 결기어린 목소리로 쿠로베에게 말한다. 
“이번엔 목숨은 살려줄테니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오지 마라, 그땐 모조리 몰살시킬 것이다. 가라. 가서 전하라. 울릉도와 독도는 영원히 조선의 땅이라고!” 

1697년 3월 27일 조선에 돌아온 안용복은 다시 감옥에 갇히고 대신들의 갑론을박 끝에 숙종은 그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봄볕이 짚신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발 엄지발가락 위에 가만히 내려 앉았다.’로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는 안용복이라는 걸출한 한 인간의 외루운 투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문서를 갖게 되었다. 안용복의 정의감과 불굴의 정신은 훌륭한 모친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책장을 덮으며 알게 된다.
 

 

 

*강치(바다사자)

가죽은 최고급 핸드백의 재료로 쓰였으며, 이 핸드백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돼 금상까지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초 강치 한 마리 값이 소 10마리 값과 맞먹었다는 설도 있다. 1976년까지도 독도에서 발견되었다고 보고됐으나, 이후에는 서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강치는 과거 동해와 일본 북해도에 주로 서식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 독도가 최대 번식지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 대량 포획된 이후 개체수가 급감하여 1990년대 중반에 멸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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