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언의 마음산책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둔한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 는 뜻인데, 굳이 의역하자면 ‘서툰 메모와 기록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는 말이다.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강한 휘발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타고난 천재라 해도 그의 기억이 꼼꼼한 메모나 기록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자 명연설가였던 링컨은 메모를 하기 위해서 긴 모자를 애용했다. 모자 속에 항상 연필과 종이를 넣고 다녔던 것이다. 천재 발명가로 불리는 에디슨도 메모광이었다. 그가 살아 생전에 기록한 메모 노트가 무려 3,400 권에 달한다. 낭만파 음악의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슈베르트는 악상이나 특별한 영감이 떠오를 때면 식당의 식단표는 물론이고 심지어 같이 있는 사람의 등에까지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메모광이 많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책벌레로 유명한 이덕무는 감잎에까지 메모를 해서 항아리에 보관했을 정도였다. 이순신 장군은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전장에서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가 남긴 『난중 일기』는 개인의 기록을 넘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사료로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메모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메모는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련의 활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메모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소멸되기도 하고 파편적으로 남은 기억들은 사실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기까지 하지만 메모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메모를 생활화하면 기억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이 습관화되면 그 사람의 인생까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시대에는 메모도 디지털화 되어 간다. 스마폰의 등장으로 글자도 쓰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거나 음성을 활자로 바꿔주는 자동 기능까지 있다. 메모의 방식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음성녹음, 영상녹화, 사진 기록 등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방식도 다양해졌다.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남기기도 하고 SNS나 유튜브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그것을 공유하고 공감을 나누기도 한다.

메모의 도구나 표현방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메모를 하는 행위와 그 행위의 지속성에 있다. 새해가 되면 너도나도 새 다이어리나 수첩을 준비하고 새로운 각오를 해보지만 그 다이어리나 수첩을 마지막 장까지 채우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모가 가진 힘과 가치를 알지만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어느덧 12월 중순이다. 새해 새아침을 맞이하던 설렘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벌써 세밑이 코앞이라니, 아무래도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하고 머리의 총기(聰氣)는 나이에 반비례하는 것 같다. 해마다 이맘때면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지만 기억이 흐릿하기만 하다. 그럴 때마다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흐릿한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맞춰 보게 된다. 그곳에는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 하는 순간들과 그 순간의 감정들이 오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며칠 후면 2020년이 시작된다. 밝아오는 경자년(庚子年) 새해에는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역사, 나만의 감성을 기록해보자. 그것이 감사의 순간, 감사의 마음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무디고 서툴지만 강한 메모의 힘으로 새롭게 주어진 365일을 알차게 채워가 보자. 작은 감사도 기록으로 남기면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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