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창

 

나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참 많은 편이었다. 어려서 엄한 아버지 밑에서 크며 난 커서 절대로 엄한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정작 어른이 되자 나도 모르게 자식들에게 엄한 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밖에서는 선하고 부드러운 사람처럼 행동을 하는데 집에만 가면 얼굴이 굳어지고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그래도 딸에게는 무섭게 안 했는데 딸아이는 아버지가 무서웠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얼마나 딸아이를 사랑 하는지를 알게 하려고 온갖 비유를 들어가며 얘기를 했다.

“만약 네가 몸이 아파서 수술을 해야 한다면 아빠는 기꺼이 내 장기라도 네게 줄 것이다.”

“아빠, 아빠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나는 왜 아빠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지?”

딸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아들에게는 어떻겠는가? 매사에 이것 저것 간섭하고 잔소리를 해대니 아들은 늘 나를 슬슬 피해 다녔다. 아들이 하도 공부하기를 싫어해 초저녁부터 공부하라고 책상에 앉혀 놓았지만 꾸벅 꾸벅 졸기 일쑤였다. 졸고 있는 아이를 자꾸 야단치니까 아들은 울기도 하고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사정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는 내 설 자리가 없었다. 아들도 딸도 모두 엄마 편이고….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공부를 하겠어요? 제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거지.” 아내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종종 입씨름을 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감사실험을 한 결과 “감사합니다” “짜증나” “공부 좀 해라” 중에 “공부 좀 해라”가 가장 나쁜 결과로 나타났다. 명령어가 그만큼 나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여튼 아들이 중3 때까지도 공부를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을 더 이상 놔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떠나야만 했다. 교육 환경이나 여건을 바꿔주면 좀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자 아들은 나하고 상의도 없이 교내 풋볼 팀에 가입을 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공부하고는 담을 쌓게 되었다. 공부 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아들이 운동에서는 탁월한 자질을 나타내었다. 지역 고등학교 풋볼 선수들 중에 스타 플레이어가 되어 지역 신문에 기사가 종종 실리곤 했다.

그것이 기반이 되어 지금은 연방 정부에서 일하고 있으니 오로지 공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던 내가 우습게 되어 버렸다. 아들이 운동을 하는 동안 내가 늘 걱정하는 것은 인성 문제였다. 제 엄마나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고 충고를 해도 빈정거리곤 했다.

그 당시 100감사의 위력에 매료 되어 미국 곳곳에 감사 강의를 하러 다니던 터라 아들에게 100감사를 써 주기로 작정하였다. 엄마가 어떻게 너를 뱃속에 넣고 열달 동안 태교를 했으며 너를 뱃속에 넣고 장차 네가 어떤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밤마다 기도했는가, 또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날 모래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중동 사막에서 3일간 금식하며 네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내용이 적힌 100감사를 아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 뒤 우리는 누구보다 말이 통하는 부자지간이 되었고 지금은 나에게 가장 믿음직스럽고 더 이상 욕심이 필요 없는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절대로 공부하라고 재촉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부드럽기 짝이 없는 아빠가 되어 대를 이어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엄한 아버지의 악순환을 끊고 있다.

운전을 배운 지 1주 만에 면허증을 따고 운전도 나보다 더 잘하는 아들, 이 아들에게 왜 그렇게 나는 그동안 모든 게 못마땅했을까? 그것은 아버지의 욕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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