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법무부 교화과에서 근무 중이던 97년 4월, 법무연수원에서 관리자반 직무교육을 받고 있는데 느닷없이 부산교도소 보안 과장으로 발령이 났다며 본부로 들어와 신고하라는 연락이 왔다. 부산교도소라면 지난 1월 무기수 신창원의 도주사건으로 법무부 자체 조사반이 편성되어 현장을 방문. 조사하기에 이르렀고, 나 또한 그 일원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그 사고의 여파로 소장. 보안 과장이 모두 직위 해제되고 새로운 인물들로 진용을 갖추었거늘, 이 난데없는 인사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본부로 돌아오니 인사담당 근무자의 설명이 또한 같잖았다. 도주 사고 후 부산교도소 보안과장은 국장이 고심 끝에 직접 지명.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거늘, 하필 그 작자가 업무의 중압감을 못이겨 칭병(稱病)하고 드러누워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이 그를 무너지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색이 보안과장이라는 자가 계급장에 비장한 결기 하나도 담지 못한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거기에 보태어, 아무리 사정이 급박하다 한들 어디 사람이 없어 직무교육 연수 중에 있는, 그것도 본부에 근무 중인 나를 지목했는지 납득이 또한 쉽지 않아 한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힘이 들었었다.

그러나 밀려든 씁쓸함도 잠시,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국장실로 이임 인사차 들릴 때쯤엔 이미 모든 것을 헤아려 내 마음의 루틴을 정돈하고 있었다. 미안함을 담은 국장의 얼굴과 그 악수를 섭섭해 하지도 않았었다. 다만 당시 본부의 최고참 사무관으로서 곧 다가올 가을 승진심사에서의 유리한 위치마저 던진 바에야, 단기필마로 찾아가는 먼 야생의 터를 반드시 이겨내고 살아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 가장의 긴 가출이 불러오는 내 가족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담보로 잡은 시간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4월 중순, 봄빛이 자글거리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부산교도소를 찾았다. 도주사고가 있은 후 조사차 방문했을 때, 이미 시설의 취약점 및 수용분위기 등을 대략 파악했었던 터라, 내가 해야 할 일들의 순서는 웬만큼 만들어 가져갔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격언을 조심스레 되새기며. 

출근한 첫날, 구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으며 순시를 돌자니, 운동장 한쪽 외진 곳에 잘 만들어진 테니스장이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교도소 간부들과 이른바 잘나가는 주먹들이 테니스를 치며 친교를 나누었다는 곳이었다. 
순시를 수행하는 간부에게 일러 영선공장의 재소자들에게 즉시 오함마를 들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내 눈앞에서 테니스장의 모든 시설물을 부수고 철거하여 아예 그 흔적을 없애 버리도록 했다. 지난날 테니스장의 꼴불견에 고개 돌려 토악질했을 직원들의 분노와, 일반 재소자들이 마음에 담곤 했을 열패감들이 같이 부서져 부디 그 터 깊숙이 매몰돼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이후 그 자리는 순화교육반의 정신교육 훈련장으로 사용토록 지시했고 그리 시행되었다.
그와 병행하여, 운동장 한편에 재소자용 테니스장을 따로 만들어 테니스 라켓과 공들을 비치하고 운동시간에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사소한 듯 하여도 그런 접근이, 망설이고 닫힌 재소자들의 마음은 물론, 교화의 통로를 열어주는 단초로 역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탓이었다.

재소자들의 출역공장들을 돌아보니 반장들의 거의가 조직깡패 출신들로 임명되어 있었다. 범죄단체조직 출신들의 반장 임명 금지는 이미 1년 전에 공문으로 하달, 지시된 바 있는데, 큰 사고까지 일으켜 더욱 자숙해야 할 시설에서 이렇듯 구태의연한 작태가 지속되고 있음이 놀라웠다. 
본부와 긴급히 상의하여, 범단조직 출신들의 반장 완장을 벗겨 버림과 동시에 모조리 호남지방의 교정시설 등 타 교도소로 이송시켜 버렸다. 모두가 순순히 인사하고 떠났다. 웬만한 건달들은 면식이 있는 자들이었고, 까불어 봐야 달라질 게 없음을 내가 알고 그들 또한 알고 있음이었다. 부임한지 2주일 만이었다.

이 과감하고 전광석화 같은 조치가 믿기지 않는 듯 직원들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역력했고, 그 만큼 더해진 신뢰와 자신감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듯 느껴졌다. 틈을 주지 않고, 지난 도주사고를 거울삼아 예상되는 각종 교정사고의 예방을 위한 매뉴얼을 보강하고 간단없는 교육과 훈련에 땀을 흘렸다. 또한 검.경과 합동으로 구성된 신창원 수사반 회의 참석은 물론, 추적 직원들의 독려에도 소홀할 수 없어 몸과 마음은 늘상 바쁘기만 했다.
만기 출소하는 자들을 수시로 면담, 애로사항을 듣고 처우에 참고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출소자들의 얘기는 대동소이했다.

“과장님이 오신 후 징역살이가 빡세져 불평들 많이 했습니다만 만기방에서 생활하며 돌아보니, 이런 중범수용 교도소야 말로 재소자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엄정한 기강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갑니다. 과장님과 직원들의 고생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쩜 아부 같은 말 일지언정 출소와 동시에 객관의 눈으로 교정을 돌아보는 듯한 모양들이 고마웠다. 이윽고 9월이 왔고 교정감 승진이 발표 되었는데 내 이름도 거기 있어 좋았다. 나를 따라 준 직원들과 재소자들에게 감사하고, 신창원의 그림자와도 이별한 뒤 부산 교도소를 떠나왔다. 위기란 위험 뿐 아니라 기회도 함께 온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며.

            이태희 (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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