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30)

인천구치소에 근무하던 중, 98년 7월 1일 부로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던 법무부 교정과로 발령을 받으니 이제 내 앞날은 탄탄대로 일듯 싶었다. 그랬는데, 99년 12월 31일 첫 기관장 보직을 안동교도소장으로 받고 보니 책상을 짚고 일어서는데도 무릎이 흔들렸었다. 
평소의 바램과는 달리 뜬금없이 먼 곳에 버려진 듯한, 일시에 다가든 무력감의 크기는 그리 감당이 버거웠다.
그나마 직전에 교정국장으로 모셨던 법무부차관께서, 임지로 떠나기 전날 점심을 사 주며 능청을 가득 담은 어투로 등 토닥여 주는 마음 씀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네 이번에 어디로 가지?」
「삭풍이 부는 데로 갑니다.」
「삭풍이 부는 곳이 어디야?」
「안동교도소장으로 갑니다.」
선문답 주고 받듯 말이 오간 뒤 그분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이 사람, 내 고향이 안동인지라 안동교도소 관리 잘하라고 특별히 보내주었거늘 삭풍이 부는 곳이라니! 자네 아예 출세는 포기할 작정이구먼. 허기야 안동교도소가 산중턱에 올라 앉아 있으니 바람 꽤나 불기는 하겠네.」
그 말끝에 한바탕 같이 웃었다.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설득이 된다고 했던가, 그 웃음에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져 왔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그분이 법무부장관으로 재임할 때 내가 교정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를 했었는데, 본부장 및 실,국장 등이 함께 하는 간부회식 때면 「삭풍이 부는 곳」 이라 했던 과거의 내 발언이 장관님의 취기에 수시로 소환되곤 했다. 「내 고향이라 특별히 배려해 보내었는데, 삭풍이 부는 곳이라고 내 고향을 스스럼없이 능멸한 작자다. 하마터면 교정본부장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고 농담을 던지니 모두가 파안대소하며 즐거워들 하곤 했었다. 각설하고, 99년 12월 30일 임지로 향했다. 날씨는 눈이라도 내릴 듯 우중충했다. 안동으로 접어들어 교도소에 다다르니 입구 좌측 교정아파트의 흉한 외관이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오면서 눈에 들어오던 군인아파트 등 인근의 깨끗한 아파트들과는 달리 샷시도 없는 복도식 아파트에 나무틀을 덧대고 비닐을 덮어 놓았는데, 곳곳이 찢어져 바람에 펄럭이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튿날 부임하여 간부들의 신고를 받고 소 내외를 순시해 보니 모든 시설물이 한결같이 밋밋하고 또 노후했으며, 마주하는 직원과 재소자들의 눈빛들 또한 도무지 성취동기를 잊어버린 듯 매가리가 없어 보여, 발걸음을 내디디는 내내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순시를 마치고 정문을 나설 때 쯤 이미 나는 스스로를 추궁하고 있었다. 조직의 앞자리를 인정받으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법이라고, 나를 따를 저 수많은 직원과 재소자들의 방전되어 버린 듯한 활력과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놓고 말리라고.
우선 조직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인적. 물적 외관부터 신뢰와 자신감의 상징을 표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타성적이고 위축된 근무의 행태들은 대게 그런 것들에서 비롯되고 누적되어지기 마련이었다.

맨 먼저 교도소 입구 큰 길가에 거지꼴을 하고 서 있는 교정아파트를 새것처럼 만들었다. 묵은 때를 벗겨 멋진 색깔로 도색하고, 삭풍에 대책 없이 흩날리던 때 묻고 찢어진 비닐들을 싹 걷어낸 뒤 복도에 샷시 창문을 달아 개비하니, 그 새롭고 깨끗한 모습에 모두들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또한 기둥만 초라하게 서 있던 교도소 입구의 외 정문에도 가로로 멋진 간판을 걸고 안동의 교정을 표방하는 의지를 적시하니, 무의미했던 일상들이 명료함으로 고개를 드는 듯했다.
「일등 교정, 꿈을 담은 교정」
출퇴근 시 그 간판의 글귀를 눈에 넣을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찌릿찌릿해 오는 듯 했다. 매일 그 지향으로 마음을 다잡고 독려했다.
직원들의 외양 또한 바꾸었다. 민원인과 수시로 접촉하는 외 정문 및 민원실 근무자들에게는 구겨지고 모양 빠지는 근무복 대신에 깨끗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정복을 착용토록 했다. 그 반듯함이 직원들의 자존감을 고양시켜 줌은 물론, 민원인들의 눈과 마음에도 산뜻하게 다가든다고 흡족해 하니 양수겸장의 조치라 할 만 했다.

시설 내 재소자들의 처우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네들의 활력과 심성 순화를 위해, 안동이기에 가능했던 하회탈춤반을 만들어 춤추게 했다. 찾아가 부탁하니, 하회별신굿놀이 보존회장이 직접 내소하여 지도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탈춤이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됨에도 양반들의 묵인 하에 놀이문화로 정착되어 상인들은 그 탈놀이를 통해 누적된 감정과 불만을 해소하고, 양반들은 비판과 풍자를 매개로 그 삶을 이해함으로써 갈등과 저항을 반감시켜 조화로운 삶을 영위」 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 아량과 지혜가 농축된 삶의 가락을 그들과 함께 감응하며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 내가 딛고 선 이 바람의 터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격랑이 일렁인들, 그 파란만장함에 결코 고개 떨구지는 않으리라고 외 정문 간판의 글귀를 읊조려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일등 교정, 꿈을 담은 교정」

           이태희 (전 교정본부장/ 현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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