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야 애초에 바래지도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교도소장 관사가 지나치게 외지고 깊숙한 곳에 자리한 것이 꽤나 낯설었다. 교도소 옆 계곡 쪽에 넓게 터를 잡아 외양은 제법 그럴 듯 했으나 공사가 날림이었던지 보일러를 틀어도 방바닥만 따스할 뿐, 밀려드는 외풍이 어찌나 심하던지 하룻밤 자고 단번에 감기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겨울 내내 늦은 밤이면 계곡을 소용돌이쳐 오는 바람의 비명들이 하 날카로워 잠을 설쳐야 했고, 봄이 되면 조용하려나 싶었건만 웬걸, 한밤중의 산새들은 또 무슨 원혼을 품어 그리 찢어질듯 우는 것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다.

거기에 보태어, 매월 열리는 안동시 관내 기관장 모임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교도소장님! 안동교도소 터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인데 관사에 혼자 자면 밤에 귀신은 안 나옵니까?」하고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우스갯소리 삼아 언급하여 순간 멈칫했으나, 「글쎄요, 이왕이면 처녀귀신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이튿날 출근하여 확인하니 그 기관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야간 외곽순찰 근무자의 순찰노선표에 소장관사가 적시되어 있었던 연유가 고개 끄덕여졌고, 그날 이후 밤의 잠자리와 꿈들이 더러 불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주하는 매일의 일상은 바빴다. 내가 만들어 가는 변화의 갈래들이 기꺼워 단 하루도 허투루 흘려보낼 겨를이 없었다. 변화와 혁신이 꼭 특별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익숙해져 눈감은 타성의 시간들로부터 낯설고 새로운 틈새를 발견. 확산하는 열정과 역량이면 충분했다.
소장 취임 이후 징벌집행중인자 중 개전의 정이 판단되는 자들은 모두 잔벌을 면제시켜 주는 특전을 배려하여, 실기한 갱생의 출발선에 다시 서게 해 주었다. 아울러 하회탈춤반의 운영을
확대, 지속토록 했다. 「하회별신굿놀이 보존회」의 회원들 또한 전업이 아니라 저마다 직장 일을 하고 취미활동의 일환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니, 형기가 긴 재소자들에게 이를 전수시킬 경우 상당기간이 경과한 후에는 안동교도소를 방문하고서야 비로소 하회별신굿 놀이의 진수를 구경할 수 있으리라는 욕심마저 작용했다.

탈춤반을 만들고 난 뒤 소내 보안청사 옆 담벼락에 하회탈을 형상화한 벽화를 그리게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재소자들을 선별, 순수한 재소자들의 작품을 만들게 했다. 「탈이란 게 지나간 어느 한 시기의 표정과 형상으로만 굳어 있는 게 아니고 변화하는 삶과 함께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면서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녀왔다」고 하니, 재소자들 또한 마음에서 걸러지고 묻어나오는 삶의 의미들을 마음껏 그려보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평생 그들이 만나고 경험하고 이별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까지.
더불어 시설 내 구석구석 습관처럼 배어있던 징역살이의 어두운 땟자국들과 노후한 부분들을 빠짐없이 도색하고 또 고쳤다. 보안과 옆 회색빛 직원이발소(재소자 이발직업훈련장 겸용)에도 사계절 돌아가는 사인볼(이발소 회전간판)을 달아 온종일 번쩍이게 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사회 친화적 얼굴을 갖게 하여 재소자들로 하여금 될수록 격리의 가드레일 따윌랑은 잊고 살게 하고 싶었다.

또한 직원들의 사기를 돋우고자 자체 골프연습장도 만들었다. 교도소 밖 산기슭에 자체 사격훈련장이 있었는데, 연 1회 직원들의 사격훈련 외에는 방치 되다시피 한 곳이라 골프연습장으로 병행하여 사용하기에 제격이었다. 사격장 뒤편 둔덕에 큰 기둥들을 세워 그물망을 치고, 사대 쪽에 여러 개의 타석을 만들어 연습용 아이언을 비치하니 제법 연습장 모양이 갖추어 졌었다.

나는 골프를 쳐본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골프 붐이 일어 안동만 해도 교도소 인근에 연습장들을 여럿 볼 수 있었기에, 행여 그런 것들이 열등의 지푸라기로 직원들의 마음에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주어진 여건을 즐기지 않는 것과 여건이 주어지지 못해 즐기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흐름을 전혀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2000년,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바뀐 해의 벽두부터 꽃 피는 봄에 이르기까지 마냥 바쁘고 또 바빴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열정이거나 오기라는 말에 동의하며 땀 흘리자니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마산교도소 교화위원 (교정 참여 민간위원)인 K였다. 지난 시절 마산교도소에서 남달리 친교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나의 첫 기관장 부임을 축하하러 왔다는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축하의 선물을 거론했고, 나로 하여금 그 선물을 선택하도록 강권했다. 나는 여자사동의 교도관 휴게실로 말없이 그를 이끌었다. 나와 함께 찾아들어간 여직원휴게실의 그 형편없는 초라함을 지켜보던 K의 고개 끄덕이는 품새를 보아하니 이미 내 뜻을 눈치 챈 듯 했다. 
변색된 벽면이며 찢어진 소파 등, 진작에 그 환경을 바꿔 주고 싶었으나 교정아파트 보수 공사 등 본부에서 지원 받은 예산이 적지 않았던 터라 더는 요구할 염치도 없어, 마음만 답답한 채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K 의 도움으로 한갓진 시골 교도소 여직원 휴게실이 더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환골탈태하여 문을 여니, 아기처럼 기뻐하는 여직원들의 눈망울이 마음을 아리게 했고, 부임 첫날 다짐했던 무수한 언약과 감회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났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그날 밤은 k 와 더불어 계곡 산장(관사)에서 오래도록 감사의 잔을 나누며 대취했었다.

                               이태희 (전 교정본부장/ 현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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