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2007년 1월 이사관으로 승진, 대구지방교정청장으로 발령이 났다. 대구지방청은 부산, 대구, 울산, 경북, 경남 등 5개 광역자치단체에 걸쳐 소재하는 16개의 교정시설을 관리, 감독해야 했으니 그 관할구역과 시설의 규모가 실로 방대했다. 
임지에 부임하여 산하 교정시설들에 대한 초도순시를 거의 마칠 무렵인 9월 중순 경에 본부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으니, 한.일 교정직원 무도대회 단장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한일 교정직원 친선 무도대회는 1978년 일본에서 주최한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한•일 양국에서 번갈아 개최해 오고 있었는데, 검도와 유도 2개 종목의 친선경기를 통하여 양국 교도관의 무술기량을 연마하고, 나아가 상호 간 친선도모와 양국 교정시설 참관을 통한 교정제도의 비교연구로 교정행정 발전을 도모하자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이튿날 바로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으로 가서 무도대회에 대비하여 훈련을 하고 있는 선수들을 만나 격려했고, 그 일주일 뒤 선수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은 배움이고 영감이며 동기부여」라 했거늘, 차제에 일본 행형의 각종 제도와 시설들이 응축하고 있는 함의를 보다 넓고 깊게 들여다보고 올 작정이었다. 교정시설의 방문이 상호간의 행형 운용에 영향을 주고받고 공감을 전파함에 뜻을 두고 있다 하니 더욱 그러했다.
일본에 도착한 뒤 법무성에 들려 교정국장을 접견한 후 도쿄구치소 참관 및 동구치소 무도관에서의 친선 무도경기를 가진 것을 비롯, 오사카로 이동해 후쭈형무소를 참관하고 시합하는 등 일주일이 넘게 일본의 교정시설들을 순방하고 또 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일본의 교정시설 중 교도관으로서 일평생 내게 익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낯 선 구조의 시설물 하나가 화살처럼 내 눈에 꽂혀왔는데, 그게 주는 놀라움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일본에 머무는 내내 그것이 주는 찝찝함 탓에 다른 모든 것들은 안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문제의 그 시설물은 다름 아닌 각 사동 거실문의 배식구였다. 
우리의 모든 교정시설 배식구는 각 거실 문 하단에 위치하고 있었고, 최근 신축되고 있는 시설 까지도 배식구는 어김없이 거실문의 하단부에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재소자들이 가끔씩 그 배식구를 개구멍에 빗대어 개밥을 받아먹는다고 자신들을 비하하는 소리도 가끔 하곤 했으나 우스갯소리쯤으로 치부했을 뿐, 교도소 배식구의 이 구도에 일제강점기의 식민주의적 차별과 모멸의 의미가 숨어 있을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일본의 행형시설을 내 눈으로 직접 참관해 보기 전까지는.

참관 후 내가 놀란 까닭은, 일본의 교정시설은 신축과 구축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거실문의 배식구가 가슴 높이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놀라운 것은, 일본에서는 근대적 행형시설이 건축되고부터 이제껏 시설내 거실의 배식구는 하나같이 가슴 높이로 만들어 왔었고, 우리의 행형시설처럼 거실 문 아래쪽에 배식구를 위치하게 한 적은 아예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시기를 같이하여 건축된 모든 교정시설들 까지 하나같이 본토와 조선을 구분, 배식구의 위치를 달리하여 지어지게 해 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놀라운 증거요 발견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정시설에 구금된 독립투사를 비롯, 모든 피 정복민들에게 깊은 심리적 열등의식을 심어주고자 하는 음험한 의도로, 모멸의 의미를 가득 담아 마치 개밥을 주듯 배식구를 거실 출입문 하단에 만들었던 것으로 사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설물의 기저에 숨겨진 비열한 의미조차 몰각한 채, 우리의 교정시설은 작금에도 그 옛날 식민주의가 의도한 배식구의 형태를 생각 없이 견지하고 있음이 황당했고 분통을 감추기 힘들었다.

한일 교도관무도대회가 시작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수많은 선배 교도관들이 우리와는 다른 일본 형무소의 시설을 둘러보았을 것임에도, 왜 그러한 문제점을 발견, 제기하고 고쳐나가지 않았었는지 그 방조의 행태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집단지성의 축적 수준이 이렇게 바닥을 기고서야 도대체 무엇을 하나 제대로 이루어 갈 수 있을지 내뱉어 지는 한숨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굴욕감을 가득 주는 시설과의 조우가 주는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귀국하자마자 내가 찾아낸 우리 교정시설의 문제점을 상세히 본부에 보고하였고, 기관장 회의 시에도 그 배식구의 문제점을 강력히 부각시킴으로써 신설 교정시설은 물론, 기 구축된 교정시설 까지 예산을 배정하여 순차적으로 배식구의 위치를 고쳐나갈 것을 건의했으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하여 안타까웠었다.

이후 내가 교정본부장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가속의 페달을 밟을 수 있었으니, 전국 모든 구축 교정시설의 배식구 위치를 가슴 높이로 위치변경 작업을 완료함과 동시에 아예 교정시설 건축 기본설계도 까지 차제에 고치고 나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거창한 문구가 떠오를 만큼 깊은 감회가 밀려왔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행형시설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개밥의 치욕을 감수하게 한, 일제가 몰래 숨긴 핍박의 구도를 뒤늦게나마 깨우치고 찾아 모두 없애니, 그나마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애국의 작은 역할이었다는 자부심에 가슴 뿌듯했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은 진작에 했어야 할 우리의 의무였다는 생각에 박수는 마음에 감추어 두었었다.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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