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의 리더십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클레오파트라, 출처 = Wikimedia Commons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클레오파트라, 출처 = Wikimedia Commons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가 변했을 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로마 역사의 주인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첫 번째 만난 연인은 카이사르였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이집트 원정을 할 때 이집트는 클레오파르타의 남동생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혹적인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그녀가 권력을 잡아 여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클레오파트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바로 로마에 있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카이사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킨 측면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카이사르는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했다. 크게 실망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를 즉시 떠나 이집트로 돌아갔다.  

이집트에서 절치부심하던 그녀에게 두 번째 남자 안토니우스가 나타났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나서 실질적인 1인자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없어지면 내부의 적이 등장하는 법이다. 이때부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속주 전체를 동쪽과 서쪽으로 영역을 분할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2년 동안 정치 투쟁으로 방치된 로마 세계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로마 세계의 동부는 안토니우스가,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한 결정은 안토니우스가 주도적으로 내렸다. 

암살자들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실상의 승자는 안토니우스였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체질이 허약하여 전쟁 중에도 몸이 아파 제대로 싸우지 못해 전투에 지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명분에서 밀렸던 안토니우스는 마지막 전투인 필리피 회전에서 승리의 주역이 됨에 따라 자신감이 생겼다. 그 여세를 몰아 옥타비아누스를 몰아내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다시 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왜 동부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파르티아 원정이 명분이었다. 
파르티아는 로마인에게는 상처가 있는 곳이다. 1차 3두정치의 일원이었던 재벌로 알려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수행하다가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있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로마의 내부를 평정한 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발표한 상태에서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파르티아는 로마인들의 가슴에 미완성의 숙제로 남았다. 카이사르조차 이루지 못했던 꿈을 안토니우스가 이룬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로마인의 영웅으로 등장할 수 있으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또 하나 동부는 경제력에서 볼 때 서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한 상태에 있었다.

동부를 향해 나아가는 안토니우스 앞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동쪽으로 진군해 가는 그 앞에 동방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달려와 충성 맹세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행로였다. 동방의 왕들은 늘 승자 편에 발이 빠르게 줄을 서 온 전통이 있었다. 그들은 경제력은 우월할지라도 군사력에서 로마를 상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생존 전략 차원에서 승자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거침없이 동부로 향하던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남동부의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에 당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했다. 강제 소환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연합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과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를 질책하기 위한 문책성 소환이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가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성격과 재능을 제대로 파악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다. 
 

“독재자요, 깡패요, 주정뱅이요, 겁쟁이인 안토니우스는 몸이 건장하다는 것을 빼고는 아무 장점도, 교양도 없는 사람, 술에 취해 천박한 창녀와 시시덕거릴 줄밖에 모르는 검투사 같은 사내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안토니우스를 매료시킨 클레오파트라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로마의 1인자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승자가 되었다. 그녀는 대범하게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기원전 41년 가을부터 기원전 40년 봄까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궁정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제공하는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닥쳐올 정치적인 파장을 망각한 채 편안한 삶을 누렸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본국에서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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