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감옥에 갇힌다는 두려움이 범죄를 멈추게 한다면 그것으로 한 명의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는 경구를 교도관이라면 한 번씩 자긍심을 담아 고개 끄덕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그렇듯 외롭고 험하게 다가드는 곳, 그곳을 지키는 격무를 감내하는 교도관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정부에서는 교도관들의 해외 교정시설 순방기회를 적지 않게 배려하고 있었다. 
내게도 본부로부터 스페인의 교정시설 순방팀을 이끌고 다녀오라는 연락이 왔었는데, 나는 이를 사양하고 중국 순방팀으로 배정해 주기를 부탁했다.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된 나라, 그 공산주의 체제의 행형이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으로의 여행은 향발과 도착간의 비행시간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 공항의 문을 열고 처음 마주한 북경은 그야말로 혼잡한 교통과, 안개로 도배된 듯한 짙은 스모그를 펼치고 우리를 맞이했다. 
숙소를 찾아 짐을 푼 다음 날 일정에 짜여진 대로 북경에 소재한 감옥(중국에서는 교정시설이 감옥으로 불려짐)을 찾으니 소장 이하 간부들이 우리를 맞이하였고, 간략한 현황설명이 있은 후 소내를 둘러보는데 기동타격대가 장총에 착검까지 하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이미 우리와는 전혀 다른, 엄형 위주의 수용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의 감옥 근무 직원들도 지금이야 법무성 소속의 공안으로 분리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인민경찰로 통합되어 있었다. 강당으로 안내하여 청소년 재소자들의 기예를 보여주는가 하면, 이곳저곳 시설물들을 자랑삼아 안내하였으나 쌍팔년도 우리 행형의 익숙한 냄새들만 풀풀 나는 듯해 서둘러 돌아서 나왔다.

교도소를 나와 북경을 돌아보았다. 자금성은 크기만 해 무릎이 아팠고, 만리장성은 온통 인파로 붐벼 짜증스럽기만 하니,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쉬고는 이튿날 상해로 향했다.
상해의 제00 감옥을 들렸는데, 과거 영국 관할 조계지에 건립 되었다는 이 시설은 아주 고풍스러운 서구식 구조를 하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음이 놀라웠다. 
그런데 그 멋진 시설에 어울리지 않게 수용처우의 행태는 북경의 감옥과 진배없었다. 이곳 소장이 시설을 돌아보던 중 나에게 던지는 말인 즉, 중국의 행형은 수형자들의 인권 배려에 소홀함이 없도록 처우제도의 개선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도사 앞에 요롱흔드는 듯 까불어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한술 더 떠, 구내시찰을 마치고 소장실에서 소내 현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소장이 갑자기 내게 영어를 던졌다.
"Can you speak English?"
"Only speak a little."
엉겁결에 대답하고 그를 보니 우리가 대동한 조선족 통역을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법률이나 행형용어를 모르니 통역이 원활할리야 없었다.
그러나 왠지 통역의 문제보다는 내게 영어를 던져 기를 눌려 보려는 기색 또한 없지 않은 듯 보여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의 시도가 무색하게끔 그의 영어는 나만큼이나 짧았고, 그래서 그와 나의 언어는 서로 짧아 오히려 소통이 원활했다. 하마터면 많은 부하직원들 앞에서 크게 창피를 당할 뻔 했었다.

교도소를 나와 상해에 남아 있는 우리의 의미로운, 그러나 또한 뼈저리고 치열했던 역사의 잔해들을 찾아 나섰다. 상해임시정부 청사가 소재한 거리는 많은 한국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는데, 3층의 아담한 벽돌 건물로 복원된 청사내부를 둘러보자니 북받쳐 오는 감회도 잠시,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슬픔의 냄새만을 가득 안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축축함을 추스리고, 상해를 뒤흔들었던 사나이 윤봉길 의사를 찾아 홍구 공원을 가니, "아Q정전"의 작가 "루쉰"이 공원의 이름마저 가로채고 앞을 막고 있었다. 이상했다. 

책으로 마음이 부유했던 젊은 시절, 일본문학전집 8권을 일독한 것 중 도저히 읽어
줄 수 없어 덮어버린, 눈과 시골 담배창고로만 기억되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이 훗날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계 문학전집을 통독하면서도 잡설을 늘어놓은 것만 같아 유일하게 건너뛰어 버렸던 아Q정전이 중국근대문학의 대표작으로 부각, 오늘날 공원을 이름 짓고 동상마저 세워지기에 이르렀고 보면, 내 문학적 식견이란 게 마냥 바닥을 긴 듯해 섭섭했다.
2층 목조건물인 매원(梅園)을 들어서니 25살 젊은 나이로 민족을 위해 포효하고 떠난 윤봉길 의사의 사진과, 그의 어머니가 감옥에 수감된 아들 윤봉길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걸려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러나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치열한 삶의 증거물들과, 역사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 버리고는 서슴없이 떠날 줄 안 사나이를 만날 수 있음은 자랑이었다. 역사의 교훈에 둔감해서는 안될 이유를 그를 만나고 새삼 깨우쳤다.
시끄러운 중국인들의 소리에 밀리며 장가계를 어렵게 오르내리고 나니 어느덧 출장 일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중국의 행형은 짐작한대로 후진적이라 도대체 귀에 담아 갈 게 끝내 없었다. 귀국길 비행기에 탑승하며 다시 와 보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했었음에도 그런 적은 없었다.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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