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의 리더십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찬, 출처 = Wikimedia Commons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찬,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이다. 사랑의 포로가 되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앞에만 서면 착해지는 남자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요구하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대권 경쟁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남매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애인 관계를 청산하고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그리스식으로 결혼식을 화려하게 올리고 아이들을 적자로 인정했다. 

그게 문제였다. 안토니우스는 이미 로마에 아내가 있었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아내를 잃은 후 재혼한 상태였다. 그 결혼 상대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였다. 옥타비아는 헌신적인 아내였다. 안토니우스도 아테네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가정에 충실하여 딸도 태어났다. 가정의 안정을 찾은 그는 아테네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지난 만남은 추억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 원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클레오파트라를 만났는데 사단이 발생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나아가 결혼 선물로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어버렸다. 대부분이 로마 속주이거나 로마의 동맹자로 동방을 다스리는 제후들이었다. 단 하나 헤롯 왕이 다스리는 유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유대를 제외한 중동지역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맹주로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의 상처로 남아 있는 파르티아 원정만 성공하면 문제를 다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모든 길은 파르티아 원정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기원전 36년 봄,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했다.

병사 수만 해도 11만 명이 되었다. 파르티아군의 병력은 얼마였을까. 4만 명에 불과했다. 

단순한 전력 비교를 하면 게임이 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후들은 전쟁의 의미를 간파했다.

이집트 여왕이 로마군을 이용하여 파르티아 영토를 정복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파르티아 편을 드는 바람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형세에 놓였다. 로마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 소식은 로마에 알려졌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어떠했는가.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 지방이라고 불리는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일대를 평정하느라 정신없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다시 시도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너무나 믿었던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승전 소식이 필요한 안토니아누스는 파르티아보다 약체인 아르메니아왕국을 정했다.

아르메니아 원정은 별다른 저항 없이 가볍게 정복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의기소침해진 안토니우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준비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세계 전체를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아내 옥타비아에게는 이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집트에서 치루어진 개선식은 로마인들을 또다시 격분시켰다. 개선식은 로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정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여 ‘2차 3두정치’를 더 이상 경신하지 않기로 의결했고, 안토니우스가 동서로 양분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시에 안토니우스와 누나 옥타비아의 이혼을 허락했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명분이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는 명분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명분을 쌓아갔다.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다."  

로마와 이집트의 싸움이 되도록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로마인 이야기』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두 사람을 비교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는 않았다. 아이가 있었으나 정식 혼인 관계는 허락하지 않았다.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결혼 관계를 요구하니 그것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는 '마음대로 안 되는 남자'와' 마음대로 되는 남자'를 두어 로마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사랑인가, 명분인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에 사활을 건 마지막 전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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