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미 대륙 횡단버스에 한 사나이가 올라선다. 사나이의 초췌한 외양과 음산한 눈빛은 여행으로 들뜬 버스 안 사람들을 일시에 긴장하게 만든다. 그는 이제 막 죗값을 치르고 교도소 문을 나선 출소자인 것이다. 
석방되기 전 그는 이미 아내에게 거짓 없는 그의 마음을 전달한 터다. 아직도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버스가 지나가는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 달라고, 노란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해 그냥 떠나 갈 것이라고….

베스트셀러 "노란 손수건"에 실려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얘기의 도입부다.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출판되기 이전인 1973년, 미국의 "토니 올란도" 와 두 명의 여성이 모여 결성된 그룹 돈(Dawn)이 바로 이 글에서 모티브를 얻은 노래 "묵은 참나무에 매어진 노란 리본(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이라는 곡을 발표하여 그 해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었는데, 가사의 의미와 더불어 경쾌한 리듬이 독특해 라디오에서 흐르는 그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 노래가 훗날까지 오래도록 내 곁을 서성이며 내 삶의 발걸음을 이끄는 인연으로 다가설 줄은 미처 몰랐었다.
무엇보다 교도관이 되고 보니, 그 소설과 노래에 배어든 아픔과 사랑의 의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가슴에 안기어 왔었다. 버려져 흐느끼는 밤과 몸부림치는 어둠을 읽을 수 있었고, 호송버스의 성에 낀 차창에 쓰고 또 지우던 누군가의 이름들도 훔쳐볼 수 있었다.

1998년 법무부 교정과 서기관으로 근무할 무렵, 1975년부터 모 출판사에 의해 번역. 출판된 이래 바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 선풍을 일으킨 바 있는 "노란손수건"이 1백 쇄를 돌파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동 출판사가 동숭동 거리 느티나무에 노란 손수건 5백장을 걸었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I.M.F의 여진이 남은 각박한 세태에 시의적절한 이벤트라 생각되어 마음의 박수를 보냈었는데, 그러나 또한 그로 인해 길어 올려지는 안타까움의 질료들은 따로 있었던 까닭에 교정지(矯正誌)에 또 한 자 끄적였었다. 
저마다 가슴 한켠에 긴 기다림 뒤의 약속 하나씩은 보듬고 사는, 물빛 눈망울들이 감옥에 가득할진데, 열망하는 삶을 닮은 휘날림, 그 희망의 노란 손수건을 걸어 둘 장소가 어디 동숭동뿐일까 하고.

2007년 이윽고 서울지방청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 이게 교도관으로서의 내 마지막 보직이리라 각오했었다. 약속할 수 없는 벼슬에 미련을 두느니 차라리 내 이력의 끝을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소진해 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는 구세군 냄비처럼 희망을 타종하는 일을 찾았으니, 그게 바로 희망등대 운동이었다.
회고해 보자면 내 행형의 경험은, "폐허를 서성일 것인가, 잔해를 치울 것인가"라는 단순한 선택에 대한 번민에 다름 아니었다.
아메리칸 버티고(American Vertigo)의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서구의 징벌정신이 오랫동안 나병과 페스트라는 두 가지 경쟁 모델 사이에서, 즉 배척하고 추방하는 권력 모델과, 인식하고 계산하고 결국 포함시키는 보다 근대적인 권력 모델 사이에서 망설였다"고 알카트로즈를 앞에 두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행형의 발자취를 회고할진대, 응보적 행형의 장막을 걷고 16세기에 비로소 근대 행형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 징치장이 나타났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복수하려함이 아니고 개선시키려 함이로다. 나의 손은 엄하나 나의 마음은 따뜻하다." 라는 슬로건을 들고. 더불어 18세기에 들어서는 존 하워드(John Howard)라는 감옥개량운동가의 특별한 헌신이 또한 빛을 발했으니, 얼핏 특별예방을 기저로 한 과학적 행형의 기틀이 마련된 듯 보여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근대 형사정책의 역사가 교정방법개발의 역사라고 규정될 만큼 행형관계자들의 갖은 땀 흘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폭주로 인한 형벌의 잔혹성과 비합리성을 배제하는데 다소 공헌하였을 뿐, "철장과 시멘트 벽에 의한 교정"은 이미 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 이후, 미국에서는 법과 질서를 기치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 낙후성의 표본인양 치부되어 오던 행형분야에 눈을 돌려, 심리학자 형사학자 사회학자 등을 동원, 그동안 형사정책적 방법론으로 제시되어 왔던 모든 이론과 처방들을 접목시켜 보았으나, 그러나 연일 격증하는 재범률에 뾰족한 변명의 자료 하나 건지지 못한 채, 학문적 만용을 후회하며 고개를 떨구어야 했었다. 
그에 따라 사람을 고치겠다는 고답적인 입장은 어느 순간 후퇴하고, 행형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을 가능한 한 방지하는 방법이나마 찾아보겠다는 겸허하고 솔직한 입장으로 물러서고 말았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교정종사자들이 그리 손쉽게 후퇴할 리는 만무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그 많은 실패들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인간교정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법들은 쉬임없이 모색. 구현되어 왔다. 
싱가포르의 옐로 리본 프로젝트(Yellow Ribbon Project)와 홍콩의 고용기회제공(One Company One Job)캠페인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들이 주는 영감으로 내 이력의 끝장을 데워, 정녕 출소자들을 위한 희망의 등대 하나는 높이, 내 손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다.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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