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배운다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출처 = Wikimedia Commons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출처 = Wikimedia Commons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인간이 가는 길에 놓여 있는 두 갈래 선택지다.

쉬운 길을 선택하면 언젠가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앞에서 쉬운 길을 따랐다. 명분이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 번 걸어간 길은 돌이킬 수 없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도 명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상황 속에 함몰되면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가 명분이 약한 길을 가는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시작할 때는 어려운 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안토니우스의 경륜과 힘에서 밀리는 불리한 입장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창대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명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감이 점점 높아졌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는 없다. 로마 세계를 둘이서 계속하여 통치하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가능하지 않았다.

건곤일척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탈영하는 안토니우스 휘하 장수와 장병들
기원전 31년 3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바다에서 운명을 건 전투를 치른다. 역사상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다.

자신감을 얻은 옥타비아누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안토니우스가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로 건너갔다.

마지막 결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니우스 역시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작전 회의에도 참석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하는 작전 회의는 부작용을 낳았다.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수들은 명분 싸움에서 밀리는 모습에 사기를 점점 잃어갔다. 

“우리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집트 여왕의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다.” 이런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진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장수가 이탈하면 그 휘하의 장병들도 함께 떠나는 법이다.

장수가 떠난 병영은 날이 밝으면 숙영지 하나가 텅 비는 일도 생겼다. 당황한 안토니우스는 탈영병이 붙잡히면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강경한 대응으로 장수들의 이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탈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안토니우스 진영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을 떠난 장교들은 “비록 안토니우스를 버렸지만, 그와 정면 대결하여 화살을 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휘하 부대에 배치하지 않고 귀국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관대한 조치가 전해지자 탈영병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기원전 31년 9월 2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로마 역사를 바꾸는 ‘악티움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양 진영의 전력은 어떠했을까. 안토니우스군의 해상 전력은 520척, 옥타비아누스는 400척이었으니 양적인 비교를 해보면 안토니우스가 앞서는 것 같았다.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명장 아그리파는 프레베자 만의 좁은 어귀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전의 전반부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던 동풍이 북풍으로 변한 것이다. 

아비규환이 일어나면서 클레오파트라는 “어서 돛을 올려라”고 소리치면서 도망가고 말았다.

안토니우스 역시 도망가는 클레오파트라를 발견하고서 돛을 올리고 뒤따라갔다. 그날 300척이 넘는 함대가 로마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오늘날 리비아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했다. 함께 따라왔던 수십 척의 군선과 6,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였다. 

의욕을 상실한 안토니우스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살고 싶으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둬 달라”는 편지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계속 보내자, 안토니우스는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돌아왔다. 

기원전 30년 봄,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서 각각 편지 한 통씩 받았다. 

“나는 자결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
“나는 퇴위할 테니 아들의 즉위를 인정해달라.”

안토니우스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과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냉철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나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답장을 보냈다.

옥타비아누스가 사실상 1인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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