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배운다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출처 = Wikimedia Commons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출처 = Wikimedia Commons

악티움 해전은 운명을 건 한판 승부였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후 절망에 빠졌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때문에 로마 세계에서 명분을 잃었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여 싸우면 양적인 면에서 전력이 우세하므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수와 병사들이 탈영하는 숫자가 늘어나면서 내부 분열로 전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었다. 전투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었다. 전투에서 패한 후 도망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클레오파트라와의 달콤한 사랑의 순간들이 후회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퇴각하면서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 “혼자 살고 싶으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둬 달라”는 편지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낸 이유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앞에만 서면 착해지는 남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계속되는 러브콜 앞에서 마음이 약해져 다시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의욕을 상실한 안토니우스는 “나는 자결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는 편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자살과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물에 빠지면 실오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일까. 절망 속에서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기병대가 옥타비아누스 기병대와 싸우는 데 희망을 걸었다. 기원전 30년 7월,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기병대와 안토니우스 기병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투 중이던 안토니우스의 기병들이 적진에 투항해버렸다. 비록 승산은 없지만 끝까지 싸워주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에 마지막 실날 같은 기대를 져버리게 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거짓으로 알리게 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은 죽더라도 사랑하는 클레오파트라만은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자살을 결심했다. 가슴을 찔러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투성이가 된 안토니우스는 부하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영묘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에서 초라하게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 혼자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영묘에 숨어 있는 그녀를 생포하여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붙잡힌 클레오파트라는 처량한 모습으로 왕궁으로 끌려왔다. 그곳에서 마지막 희망인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이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을 알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후계자로 생각한 아들마저 죽었으니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결심했다. 구차하게 한 여자로서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남기보다는 여왕의 모습을 하고 죽고 싶었다. 

그녀는 자살을 결행할 장소를 안토니우스가 묻혀 있는 영묘로 생각했다. “안토니우스가 묻혀 있는 무덤에 술을 따라주고 싶다”며 영묘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허락해 주었다. 무덤 옆에는 무화과 열매를 가득 담은 바구니가 반입되었다. 그 바구니에는 독사가 숨겨져 있었다. 독사는 로마 세계를 뒤흔들며 야심으로 살아온 39세 여왕의 일생을 한순간에 마무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의 순간에도 우아한 모습으로 여왕처럼 생을 마무리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3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집트는 속주가 아니고 동맹국의 대우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로마 세계의 1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영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인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신의 아들이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신의 아들이 아니면 지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14년 동안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화려한 개선식 

기원전 29년 8월,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올렸다. 당시 개선식을 하며 시가행진을 할 때 하나의 전통이 있었다.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오늘 승리했다고 거창하게 개선식을 치르지만 승리의 순간은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옥타비아누스가 걸어온 길은 어떠했는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살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카이사르가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대부분 그를 철부지 애송이 취급했다. 그런 그가 카이사르 살해 주동자들을 처리하고, 백전 노장 안토니우스와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마침내 로마 세계의 1인자로 당당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는데 일등 공신은 클레오파트라라고 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져 들지만 않았더라면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물리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때문에 명분을 잃은 안토니우스는 결국 옥타비아누스와의 싸움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애송이에서 1인자가 되기까지 무려 14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운명도 불우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기대한 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 지명’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붙들고 지혜롭게 힘을 모아 마침내 1인자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후계자가 성공했기에 카이사르의 역사도 성공한 역사가 된 것이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통해 후계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된다.
이제 최고 권력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세계를 어떻게 통치해 나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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