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언의 마음산책

“더는 못하겠어요. 자존감이 바닥입니다.” 40대 가장이 직장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 한 마디를 내뱉고 그의 시선은 멀리 허공을 향했다.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허공에서 시선을 거둔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것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무척 외롭고 힘겨워 보였다.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 가장의 무게가 느껴졌다.
2주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그는 회사에서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일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틈날 때마다 그를 찾았고, 캔 커피를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을 걸었다. 
‘지내다 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람들과도 친해지겠지.’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하루하루 더 위축되어 가는 모습이었고,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입사 2주째가 되는 날 아침, 그는 예전처럼 일찍 출근했고,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같이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업무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실장님, 저 회사 나왔습니다. 말씀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지금 어디세요? 근처에서 커피나 한잔합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그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것이리라. 
이럴 땐 이야기라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 줌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달려 나갔다.

그를 만나러 가는 동안, 문득 어린 시절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시골집 마루 천정에 뱀 한 마리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대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 깨끗한 한지를 펼친 다음 집게로 뱀을 잡아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뒷산 기슭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뱀을 풀어주었다. 궁금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내 궁금증을 알아차린 것인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내 집에 발을 들였다면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말고 고이 보내줘야 한단다.” 그랬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는 그에게 커피를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을 되돌릴 순 없느냐고.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는 못하겠어요. 자존감이 바닥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상황이 치욕스럽다고 했다. 업무에 대한 질책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인격적인 모독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한편으론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고 했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그 한마디와 함께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희미하게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받은 자존심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지만 바닥난 자존감은 좀체 회복하기 어렵다. 자존심은 마음에 박힌 못처럼 다시 뽑아낼 수 있지만, 자존감은 못이 박혔던 자국처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을 내뱉기 전에 상대방의 자존감을 배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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