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배운다

로마 원로원의 회의하는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로마 원로원의 회의하는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공화정 체제의 유지“ 그리고 ”제정체제의 수립.“
두 마리의 토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먼저 원로원이 품고 있는 황제체제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주어야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처럼 황제체제를 구축할지 모른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매년 집정관을 선거로 뽑는 공화정 체제로는 광활한 로마제국을 통치할 수 없는 까닭에 황제체제를 만들려고 했던 카이사르의 뜻도 존중해야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으로는 공화정 체제를 받아들이고, 비공식적으로는 황제체제를 구상하는 전략을 세우고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를 수립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는 안전그물도 없이 아주 가냘픈 밧줄을 타고 균형을 잡는, 대단히 어렵고 미묘한 일을 수행해야 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이미 좋은 사례를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너무 노골적으로 1인 통치를 추구했다. 폼페이우스와 안토니우스는 귀족들로부터 적절한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따라야 할 모델은 없었다. 다음 10년 동안 바람직한 정부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신중함, 인내, 결단력, 기민함을 남김없이 발휘해야만 했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귀를 의심할 만큼 기쁜 결단을 내렸다. 원로원 의사당에서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에게 돌려주겠소. 무기와 법률, 로마의 패권하에 있는 모든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줄 것을 선언합니다.”

카이사르 암살의 원인이었던 1인에게 쏠린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는 선언은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탄생

예상치 못한 그의 결단에 감격하여 원로원에서는 공화정 복귀 선언이 있은 사흘 후, 회의를 소집하여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자’라는 의미를 뜻한다. 그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동시에 평민들의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시가 전염병과 홍수가 발생하여 심각한 곡물 위기를 겪을 때였다. 원로원이 곡물 위기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이 되어 식량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나섰다. 아우구스투스가 개입하여 곡물 위기가 해결되자 평민들의 신뢰가 더욱 높아졌다. 

평민들의 신뢰가 쌓이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체제의 기틀을 마련한다. 로마 역사는 일반적으로 왕정시대, 공화정시대, 제정시대로 나누어진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체제를 유지하면서 황제체제를 접목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추진한 형태는 제정시대라고 부르지 않고 ‘원수정체제’라고 부른다. 원수정은 프린캡스(princeps), 즉 '제1시민'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황제와는 달리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을 ‘동등자들 중에서 1인자’로서 로마 귀족과의 일체감을 강조하며 즐겨 사용한 용어다. 

원수정체제는 공화정체제의 형식은 유지하기 때문에 매년 집정관 2명을 뽑는다. 1명은 아우구스투스가 종신집정관이 되고, 다른 1명은 선거를 통해 뽑는 형태다. 공화정체제는 유지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자동으로 집정관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원로원 귀족들을 특권 신분화했다.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모든 문제를 원로원을 통해 논의하고 해결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전통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원로원 귀족들을 신체제에 끌어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빵과 평화’의 해결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평민들을 확실히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권력을 점진적으로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후계 체제마저 마련해서 그 체제가 유지되게 한 것이다. 

2세기 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비교한 내용이 흥미롭다.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정치가로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보다 적절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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