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1970년대 중반 지방 K 교도소의 서무과 사무실에 젊은 여성이 찾아와 무턱대고 교도소장 면담을 청하여 오니 직원들이 무척 당황했었다.
조금은 상기된 듯한 그녀를 달래어 서무과장실로 안내한 뒤 소장 면담을 요하는 연유를 물으니, 그녀의 대답인즉슨 듣는 사람 심연에 금이 쩍 갈라질 만큼 애잔함과 당돌함을 담고 있었으니 과연 소장에게 보고할 만한 사안이었다.
그녀는 K 교도소에 수용 중인 무기수의 아내였는데, 더는 이대로 신혼의 생이별과 외로움을 견디기 힘드니 긴 세월 붙잡고 견딜 마음의 버팀목이라도 있어야 하겠다고, 그 사람의 아기라도 가져야 그를 떠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남편의 귀휴를 간절히 요망했던 것이다.

불행에 고개 숙이지 않으려는 보기 드문 그 마음과 용기가 감명을 주니, 도주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기수의 귀휴가 허락되었다. 그녀로 하여금 가임기간이 적시된 산부인과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토록 하여 귀휴일자를 지정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힘들게 주어진 3일간의 배려도 헛되이, 안타깝게도 그녀의 배태는 소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3개월 후 다시 그 무기수의 귀휴를 허가해 주었으니, 인간적인 배려를 넘어 이거야말로 순전히 목을 건 기관장의 배짱 하나로 가능했었던 일이겠다.
그 결단에 힘입은 듯 이윽고 그녀는 아기를 가졌고 이후 아들을 출산했다. 그 아이가 첫 돌을 맞이한 날 교도소를 방문한다기에 보안과 사무실에 조촐하나마 돌상을 차렸더니, 그녀 또한 백설기 떡을 가득 가지고 아이와 함께 왔다. 

무기수인 남편에게 아이를 안게 해 주니, 눈으로는 울면서도 환하게 웃고 선 그녀로 인해 우리 모두 아팠었다. 외로운 영혼을 품으며 그녀는 새삼 마음을 깨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여 자신이 떠났다면 감옥 안의 남편이 겪었을 공허함이 얼마나 크고 아팠을 것인지를.
바깥에는 백설기처럼 하얀 1월의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 후 모 잡지사에서 영화소재를 공모한다고 크게 광고하였기에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적어 응모하였더니, “결선에 오른 3편의 작품 중 탄생은 그 내용의 탄탄함이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특이시설에 대한 접근 곤란 등, 영화로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아 아깝게 놓친다.” 는 발표를 읽어 참 아쉬웠었다.

1998년, 법무부 교정국 간부들의 산행 길에 지나치던 춘천가도의 풍경이 같잖았다. 도로변 논밭들을 온통 갈아엎고 마치 전봇대 늘어서듯 자리 잡은 이른바 ‘러브호텔’의 위용이 가히 만만찮았던 것이다.
한물 간 청춘임을 망각한 채 발정난 들짐승들처럼 이 먼 곳까지 거품 물고 들락거리는 군상들의 부지런함을 서로 비웃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쳐 오는 옛일에 그만 마음이 축축해 지고 말았었다. 이런 따위의 동물적 쾌락의 배출이 아니라, 장기수 가족 등의 애틋하고 절박한 사랑을 위한 러브호텔쯤은 교도소 마다 하나씩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배필을 감옥에 두고서도 마음 저린 한 번의 약속과 손깍지로 평생을 기다리기도 하거늘. 베겟잇 눈물로 적시는 수많은 인연들이 기억의 그 아픈 파편들을 생명의 본능으로 보듬고서 돌아보고 또 돌아만 보며 목마름을 견디고 있거늘.

깨달음은 전염되는 것인가, 1999년 6월 장기수형자들에게 가족과의 일체감 및 유대감을 조성시켜 주고자 안양, 대구, 대전, 광주교도소 등 지방청별 1개 기관에 ‘부부 만남의 집’이 개설•운영되기에 이르니, 모처럼 조직의 생기를 보는 듯해 기꺼웠다. 
이른바 ‘열린 교정’을 지향, 그 일환으로 도입된 처우시스템이었다.
부부 만남의 집은 교도소 담 밖에 거실, 침실, 주방, 욕실 등을 갖춘 단독주택으로 지어 졌으며, 수형자가 가족과 함께 1박 2일간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이후 이 시설은 연차적으로 증설되었으며 명칭 또한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가족 만남의 집’으로 바뀌었는데, 내가 본부장으로 근무하던 2009년도에는 12개 시설을 추가 증설, 총 41개 교정기관에 우리만의 러브호텔(?)이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함께하는 따뜻한 밥 한 끼, 몸을 부대끼며 서로에게 건네는 한 마디 안부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치유의 힘을 담고 있을 것이었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마음의 상처를 그리 쉽게 지울 수는 없다고들 하지만, 그 마음의 부서진 자리마다 서로 나누는 정으로 데우고 메우며, 일평생 살아갈 격려와 자유를 마침내는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가족 만남의 집을 볼 때마다, 백설기 같은 눈 펑펑 내리던 그 옛날 그 겨울 K교도소의 돌잔치가 떠오르곤 했었다. 평생을 붙들고 씨름하는 우리의 화두가 교정•교화 일진데, 한 움큼의 희망이라도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섭렵하여 행형 현장에 접목해 왔었다. 
그렇지만 가족 만남의 집에 유독 관심이 가지는 것은, 그 옛날 K교도소의 돌잔치가 아름다운 은유를 담고 노상 내 마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사단법인 재향 대한민국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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