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배운다

고대 로마 군인들의 휴식하는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고대 로마 군인들의 휴식하는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5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원전 29년, 유일한 승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군사력의 처리 문제는 골치 아픈 과제로 남는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가.

1591년 조선 선조 때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중국 명나라를 치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이 단호히 거절하자 이를 빌미로 1592년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사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한 후 막강한 군사력을 처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병력 감축과 직업군인제도의 정착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군사력이 넘치는 상황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의 대폭 삭감을 결정한다. 50만 명의 군사력을 28개 군단 16만 8,000명까지 감축했다. 군사력을 3분의 1로 줄였으니 엄청난 개혁이다. 무기를 든 군인,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을 축소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군인 감축이 왜 어려운지 살펴보자. 전쟁터에서 생명을 담보로 싸운 군인들을 빈손으로 제대시킬 수는 없다. 그러려면 일자리 제공이 중요하다. 직업을 바꾸는 데 필요한 밑천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면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돈이다. 재원 마련이 가장 어려웠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빼앗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을 팔아서 모두 투입했다. 그래도 부족하여 옥타비아누스는 개인 재산까지 내놓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군사력 감축은 뜨거운 감자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어려운 과제를 군대를 재편성하는 일부터 시행했다. “로마군은 누가 지휘를 맡아도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게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을 만들고 체계화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군사 제도를 재편성할 때 기본 방향으로 생각한 것은 3가지였다. 

 

첫째, 군의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방위'에 있다. 
둘째, 통일국가 '파르티아'를 제외한 나머지 적들은 모두 개발되지 않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야만족임을 염두에 둔다. 
셋째, 방위가 목적인 만큼 '상비군'이 필요하다. 

 

최후의 승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새로운 공세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다. 그런데 손에 넣은 대병력을 스스로 3분의 2나 줄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인간의 본능을 자제하고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여 자신의 욕심을 자제할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상비군 제도 설치를 단행한 것도 로마 700년의 전통을 깨뜨린 결과다. 로마의 군사 제도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 마리우스에 의해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뀌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역 기간을 개혁 초기에 16년으로 정했다. 병역을 할 자격은 성년이 되는 17세부터였으니, 만기까지 복무하면 33세가 된다. 33세에 제대할 경우 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다. 병역 기간은 말기에는 20년으로 연장되었다. 

퇴직금 제도의 확립

더욱이 ‘퇴직금 제도’를 확립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사들이 복무 기간 중에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근무할 수 있도록 퇴직금을 제도화했다. 물론 퇴직금은 퇴역한 뒤에 여생을 여유롭게 보낼 만한 충분한 액수는 아니었지만,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자금이었다. 

기원전 7년부터 5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퇴직하는 전역병들에게 자신의 기금에서 4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했다. 하지만 황제의 기금에서 지속적으로 지급할 수 없는 까닭에 군대 기금을 설치하여 국가가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제도화했다. 다른 직업에 근무 연한 제도가 없던 시대에 병사의 복무 기간을 20년으로 정하고 퇴직금 제도까지 마련한 것은 통찰력과 결단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로마의 군단은 처음에는 28개 군단에서 서기 9년 25개 군단으로 정착되었다.

1개 군단의 병사가 약 6,000명이니까 25개 군단이면 15만 명이 된다. ‘군단병’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이 될 수 있었고, 국방의 주력 부대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을 지원하는 ‘보조병’도 제도화했다. 보조병의 복무 기간은 25년이었고, 정원은 군단병과 동일한 15만 명이었다. 로마 시민권자인 군단병은 명령에 의해 복무 지역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보조병은 출신지와 가까운 곳에 배치하여 만기까지 복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만기 제대한 보조병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개혁을 통해 속주민인 보조병을 로마군이라는 조직의 항구적인 일원으로 전환시켰다. 보조병이 로마화의 첨병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군단병과 보조병, 즉 로마인과 속주민이 함께 병역을 치름으로써 군사 기지를 통한 ‘속주의 로마화’가 촉진되었다. 이들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군단병이 현지 여자를 아내로 삼거나, 보조병의 아들이 시민권자가 되어 군단병이 되기도 하여 민족 간 융합, 즉 '속주민의 로마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전하는 ‘속주민의 로마화’에 관한 일화가 있다. 라인 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이 강 서쪽에 정착하여 속주민이 된 게르만족에게 동포끼리 힘을 합쳐 로마 군단을 습격하자고 제안하자 응답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우리 땅에 주둔해 있는 로마 병사들 중에는 우리와 인척 관계를 맺은 사람이 적지 않다. 이곳 여자를 아내로 삼은 사람도 있고, 어머니로 둔 군단병도 있다. 그들은 모두 우리 땅도 로마 본국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 당신들의 요구에는 응할 수 없다. 어찌 인간이 제 아버지를, 형제를, 자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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