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언의 마음산책

비가 내렸다. 가을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한여름 폭우 같은 비가 한 시간 가까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일까. 비가 갠 다음 날 아침, 창문을 열어젖히자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온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춥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가을을 만끽하기도 전에 초겨울의 문턱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뉴스에선 설악산 주변이 영하권 날씨라고 호들갑을 떨어대는데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기만 하다. 
파란 색종이를 펼쳐놓은 것 같은 말간 하늘 위로 가을 철새들이 떼 지어 날아간다.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길섶엔 색색의 코스모스와 회갈색 갈대들이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기에는 너무 예쁘고 좋은 계절,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이 계절을 만끽하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 주말 오후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도 하고 오랜만에 동네를 벗어나 사람들이 붐비는 도심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다. 
때마침 여의도에서 세계불꽃축제가 펼쳐지는 날이라서 식사 후에 한강 둔치를 산책하다가 불꽃놀이까지 구경하고 귀가할 요량이었다. 차를 타고 도심으로 향하는 내내 아내는 소녀처럼 들떠 있더니 그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들 뭐해?” 막내아들이었다. “응, 저녁은 먹었고? 엄마는 지금 아빠랑 시내에서 저녁 먹고 불꽃놀이도 보려고 외출하는 중이야. 아들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대학생인 아들은 아직 학교에서의 일정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깔깔 웃는다. 
“그래, 아직 청춘이지. 아들도 저녁 잘 챙겨 먹어.” 궁금했다. “아들이 뭐라고 했기에 그렇게 웃어?” 아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20대인 저보다 엄마 아빠가 더 청춘이라고 해서.”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오늘만큼은 우리가 더 청춘이지.” 

“그런가?” “당연하지. 나이 든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사는 거라잖아. 그런데 우리는 오늘 가을을 즐기고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려고 밖으로 나온 거니까 아직 청춘인 거지.” “그러네. 오늘처럼 매일매일 청춘이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내 쪽으로 몸을 밀착하고 팔짱을 끼더니 내 오른쪽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순간 내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한때 유행했던 광고 카피다.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젊게 사는 사람과 그런 삶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다. 젊다는 건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얘기다. 몸 건강은 꾸준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로 유지할 수 있다지만 마음 건강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 
전문가들은 나이를 먹어도 무언가를 꿈꾸는 삶이야말로 마음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꿈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며, 우리 마음을 긍정적인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긍정의 마음은 곧바로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해리 리버만은 81세에 그림공부를 시작해서 101세의 나이에 22번째 전시회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100세 청춘’의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모든 꿈이 해리 리버만처럼 인생을 바꿀 만큼 거창할 필요는 없다. 단지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소박한 꿈이라도 충분하다. 오늘 하루가 즐거우면 남 부럽지 않은 청춘의 하루를 산 것이다. 
가을, 무언가를 꿈꾸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꿈이 있는 한, 가을엔 누구나 청춘이 된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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