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77년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던 시절, 소록도 지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입교한 자가 있어 모두의 눈길을 끌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순천교도소 근무자 중 승진시험이나 간부 공채시험을 준비하는 자들의 경우, 근무강도에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소록도 지소 근무를
자원하곤 했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휴게시간 틈틈이 그가 들려주던 섬나라 얘기는 숨 막히는 몰입감으로 하여 삽시간에 우리를 불러 모았다.

나환자인 재소자를 수용했던 터라 근무간의 물리적 거리유지를 철저히 함은 기본이고, 월급날 지급받은 지폐들까지 한 장 한 장 빠짐없이 뜨거운 다리미로 짓눌러 소독하고서야 찝찝함을 덜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는, 어쩜 같이 나눈 대화와 시간까지도 다림질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싶어 안타까웠었다. 무력한 고립감을 달래고자 쉬는 날이면 지소 전용의 배를 띄우고 바다낚시를 핑계로 바다를 흐르며 주마등 같이 스쳐 간 지난 삶을 돌아보았는가 하면, 또한 다가올 세월의
격랑을 더불어 헤쳐 나갈 무수한 결심과 언약의 외침들을 그 바다에 토하곤 했었다고 했다. 

시를 읇는 듯 한 그의 얘기에는, 간부가 되기 위해 소록도까지 흘러들어간 그의 아픔이 가득 묻어나는 것만 같아 절로 코끝이 찡해 왔었다.
그러나 소록도 이야기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교도관과 간호원의 사랑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었으니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마른침들을 삼켰었다. 하나같이 총각들이었으니 그러고도 남을 터였다.
소록도에 소재한 국립소록도병원의 간호원과 소록도 지소의 교도관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경우가 적지 아니했다고 했다. 어쩜 똑같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사는 게 억울하여 더욱 쉽고 열렬하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 이전에 이미 양쪽 기관장들이 처녀. 총각 직원들의 단체미팅까지 주선해 주고 있었기에 만남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많은 커플이 인생의 동반을 이루었다고 했다. 아끼는 누군가와 손잡고 남은 삶을 같이하고자 한 수 많은 약속들이 그 섬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가본 적도 없는 멀리 소록도의 파도와 바람이 바다 내음을 담고 내 가슴에 가득 밀려오는 것만 같았었다.
그러나 가슴 따뜻했던 한 번의 그 기억이 물경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서도 다시 인연의 끈을 이어 그 섬을 내게 보내올 줄은 차마 몰랐었다.

`98년 9월경 법무부 교정국 교정감(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무렵, `98년 6월 24일 부로 그 기능이 폐지된 (구) 소록도 지소의 활용방안을 검토.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게 떨어졌던 것이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소록도 지소를 가본 사람이 전무하니 관계문헌과 순천교도소의 보고 문서를 취합, 나름대로의 의견을 정리하자니 간부후보생 시절의 그 소록도 친구가 문득 생각났었다.
기능이 폐지된 소록도 지소 시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교정 건축물(1935년 7월 23일 설립)일 뿐 아니라 나병질환 수형자를 처우. 선도해온 인도주의 행형의 상징적 시설물로서 뚜렷한 행형사적 족적과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바 그 시설을 보존, 교정사적지로 계속 관리하여 교정연수부 피교육생들의 정례적 참관시설 등으로 활용함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내용을 정리, 보고했었다.

다시 10년이 더 흘러 2009년 교정본부장으로 재임하면서, 마침 순천교도소 순시계획이 있던 터에 아예 소록도까지 출장경로에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어쩌면 소록도를 찾기 위해 순천교도소를 순시한 것일지도 몰랐다.
연육교를 넘어 소록도 지소를 찾아 갔다. 소록리의 하늘 가린 숲길은 깊었고,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돌아 그 숲길에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버려둔 교정의 한 조각 소록도 지소를 만날 수 있었다. 버려진 그 세월의 더께만큼 먼지화장을 한 건물들과 오랜 유배의 무게를 비명하듯 비
틀려 입을 벌린 창틀들이 보여주는 정경은 아팠다. 

다행히도 제법 모양을 잃지 않고 보존된 사동이며 사무실의 각종 집기 및 운동장 등을 돌아보자니, 장소와 사물 하나하나에 응축된 연민과 함께 역사로 숨을 가누는 한 시대 교정에 대한 가슴 벅찬 감회를 누르기 힘들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백안시하던 천형의 땅에까지 들어와 교정업무에 종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교도관들의 그 헌신과 용기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고개 들어 울창한 나무숲을 뚫고 하늘을 보자니 "노을과 감나무와 하늘과 까치밥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아왔다"던 말이 바람처럼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다.
소록도를 떠나 녹동항 쪽으로 펼쳐진 연륙교를 넘어 돌아오면서도 옛 공간과 시간 속으로 이입되어 버린 내 감정은 좀처럼 씻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그 소록도 지소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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