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언의 마음산책

딸이 집에 왔다. 딱 4년 만이다. 5년 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캐나다로 떠났던 딸은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일하면서 대학 공부까지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코로나도 한몫했다. 캐나다로 떠난 뒤 1년 만에 귀국한 딸은 한 달간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출국했다. 

그때만 해도 1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곧바로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면서 하늘길이 막히고 딸의 발도 묶여버렸다.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간간이 영상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리움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코로나 사태가 완화되면서 다시 하늘길이 열리고, 그 사이 학교를 졸업한 딸이 맘먹고 귀국했다. 

식구 하나가 늘었을 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왁자지껄하다. “하이, 굿모닝!” 딸은 아침 인사부터 하이 톤으로 시작한다. 덩달아 나와 아내의 목소리도 밝아진다. 
딸은 아침부터 주방을 독차지하고 당뇨가 있는 아빠를 위해 특별한 크림수프를 준비한다며 분주하다. 아내도 옆에서 거들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와 맛있겠다.” “우리 딸은 손도 빠르네. 요리사를 해도 되겠다.” 거듭된 칭찬에 딸의 목소리도 한 톤 더 높아진다. “내가 좀 그렇긴 하지. 난 대체 못 하는 게 뭘까?” 집안에 웃음과 생기가 넘친다. 딸은 금세 수프를 완성해서 한 그릇 담아온다.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한 숟가락 떠서 입안으로 밀어 넣자 따듯하고 달콤한 맛이 혓바닥을 녹인다. 

“어때, 아빠? 먹을 만해?” 말보다 먼저 엄지손가락이 올라간다. “최고다! 세상에서 젤 맛있는 수프를 먹는 것 같애.” “그치? 뭐, 내가 요리 좀 한다니까!” 딸은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그래,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이지. 작은 일로도 웃고 떠들고, 여럿이 모여 앉아 식사를 즐기고….’ 딸에 이어 큰아들까지 뉴질랜드로 떠나면서 너무 오랫동안 이런 분위기를 잊고 살았나 보다. 오늘 이렇게 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점심을 먹고 셋이서 외출을 나섰다. 하늘공원 억새 숲에 가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소박한 꿈은 성산대교를 넘어가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코앞인데 차가 거북이걸음을 시작했고, 간신히 도착한 하늘공원 앞은 이미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 바퀴를 맴돌다가 이내 포기하고 마포새빛문화숲으로 방향을 돌렸다. 

옛 당인리발전소를 공원화한 이곳은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크기는 아담하지만 한강과 밤섬, 그리고 여의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경관을 품고 있는 곳이다. 저녁이 되면 강물에 비친 석양도 일품이고, 해가 진 후의 여의도 야경도 꽤 볼만한 곳이다. 
공원 산책로에 늘어선 벚나무와 울타리로 심어진 화살나무가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상강이 지나고 입동이 다가오면 말 그대로 만산萬山이 홍엽紅葉일 게다. 이토록 예쁜 계절의 한복판을 아내와 딸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저녁을 먹고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집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오래 운전을 해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소파에 앉아 저린 종아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내와 딸이 서로 안마를 해주겠다며 달려들었다. 
살다 살다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황제가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딸과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하루였다. 오늘 하루 무탈했고, 오늘 하루 즐거웠다. 그거면 됐다. 가족과 함께 무탈한 하루를 보내는 것, 이것보다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내일도 평범하고 무탈한 일상이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곽동언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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