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왼팔인 마이케나스의 집에 있는 당시 문학인 호레이스, 버질, 바리우스, 자료=찰스 잘라베르(1818-1901)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왼팔로 불리는 '마이케나스'의 집에 있는 당시 문학인 호레이스, 버질, 바리우스, 자료=찰스 잘라베르(1818-1901)

아우구스투스는 '병약한 체질'이었다.

전쟁터에서도 위장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누워있었을 정도로 허약했다. 그런 그가 무려 45년을 1 인자로 통치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76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장기간 통치하면서 제도를 정비한 덕분에 팍스 로마나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는 황제 혼자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곳곳에 인재를 등용하여 맡기는 전략을 구사했다. '권한위임의 귀재'라고 불릴 정도로 과감하게 일을 위임하고 큰 틀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두 사람의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여 국정의 동반자로서 통치를 해나갔다. 

“군사 분야의 아그리파, 외교‧문화 분야의 마이케나스다.”
충직하고 뛰어난 참모가 있었기에 팍스 로마나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 안목이 부족하여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아그리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그리파가 17세 때 추천하여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도록 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12년에 사망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거둔 군사적인 승리는 모두 아그리파의 전략과 지휘 덕택에 가능했다. 

아그리파는 일생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으로 살았다. 군사뿐만 아니라 건설에서도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빛을 발했다. 아그리파는 모든 신들에게 바쳐졌다는 뜻을 담아 ‘판테온’ 신전을 건설했다. 아그리파는 판테온 남쪽에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목욕탕’도 만들었다. 이 목욕탕은 욕실, 마사지 시설, 체육장, 독서실, 오락장까지 갖추었다. 

아그리파가 세운 공공건축물은 이탈리아를 넘어 제국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남프랑스의 님에는 ‘퐁 뒤 가르(가르 다리)’가 남아 있다. 주민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이 다리는 길이가 370미터, 높이가 48미터나 되는 수도교이다. 

공공 봉사 정신이 뛰어난 아그리파는 죽을 때 개인 재산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남기고 공공을 위해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아그리파는 공공사업에도 정열을 바쳤다. 그는  그 방면에 숙달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예도 상관하지 않고 우수한 기술자 집단을 구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죽은 뒤 기술자 집단에 속한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기사 계급으로 승격시켜주었다. 해방 노예들을 주축으로 나중에 로마의 ‘공공사업청’을 창설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위가 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가 남편이 자식도 없이 사망하자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을 받고 재혼까지 하게 되었다. 재혼한 아그리파와 율리아는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후계 문제를 중요시하던 아우구스투스는 손자가 3명이나 태어나 너무 기쁜 나머지 외손자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양자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은 건강 체질이 아니었으나, 아그리파는 강인한  체질인 까닭에 자신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믿고 외손자들이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아그리파가 일찍 사망하자 후계 구도도 무너져 버렸다.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업의 '메세나 운동'의 원조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한 또 한 명은 '마이케나스'이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수투스보다 한 살이 많지만 외교, 문화, 홍보 분야를 충실하게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이케나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환상적인 팀이 되어 아우구수투스 황제를 보필했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아그리파, 왼팔 마이케나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호흡을 맞추어 업무를 처리했다.

사실 마이케나스는 오늘날 기업이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메세나 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가 바로 마이케나스다. 마이케나스는 당시 역사가, 시인 등 문학가들이 로마 역사를 기록하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마이케나스의 후원에 힘입어 문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껏 재능을 발휘하여 역사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베르길리우스, 『서정시집』과 『서간시』를 남긴 호라티우스, 서사시로 간주되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문학인들은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였을까.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시인 호라티우스를 지원한 구체적인 사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에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거리를 다니면서 대도시의 삶을 관찰하며 지낼 수 있도록 충분한 수입을 제공했다. 나중에는 그 시인에게 티볼리 근처의 사비니 시골에 방이 24개 딸린 집과 노예 8명과 소작농 5가구를 둔 드넓은 사유지를 제공했다. 이곳에서 호라티우스는 빈둥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시골의 한적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에 힘입어 라틴어는 시의 매체로 완벽하게 확립되었고, 라틴 문학은 세계의 위대한 문학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메세나 운동'이 로마 시대 마이케나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당시 마아케나스가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한 덕분에 라틴문학이 꽃피울 수 있었다. 역사적인 효과가 있었기에 메세나 정신이  역사를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메세나 운동은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후 각국의 기업인들이 ‘메세나협의회’를 설립하여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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