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최근 화성여자교도소 설립을 두고 인근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서는 마음이 언짢았었다. 기왕에도 화성직업훈련 교도소와 외국인수용소 등의 기피 시설들이 있는데, 더 이상 교정시설의 증설을 용인할 수는 없다는 게 주민들이 내세우는 항변의 요지였다.

2009년 8월 13일 화성시 마도면 석교리 외진 곳에 화성 직업훈련교도소의 문을 열었을 때, 여자교도소의 터는 이미 근거리에 마련되어 있었고, 인근 주민들은 쌍수를 들어 교도소의 불 밝힘을 환영했었다. 
당시만 해도 이른바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강력범죄의 다발지역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진 도시였던 데다, 시 외곽의 한갓진 지역이라 밤길조차 쉽지 않던 터에 문득 교도소가 들어서니,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는 시설의 그 불빛들만으로도 이미 밤길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었다. 

더욱이 주변에 많은 교도관들이 이사를 오고 그들이 밤길을 오가고 하니 절로 마음이 든든해  지며,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다고 말하고들 했었다. 교정 시설이 존중받지 못하는 불편함이야 하루 이틀 겪은 게 아니지만, 화성의 경우는 그 이기적 편향이 지나친 듯싶었다.
교정시설은 언제나 도시의 궁벽한 곳을 찾아 섬처럼 존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게 곧 형벌의 역량이요 법이 주는 위안이라 맹신하는 시대와 이웃들을 함께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미 옮겨 간 성동구치소도, 현재 이전을 아우성치고 있는 안양교도소, 대구교도소 등 모두가, 77년 내가 임관했을 무렵만 해도 하나같이 도시의 후미진 구석에 홀로 덩그러니 세워져 몸을 움츠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교정시설로 인해, 아무도 찾지 않던 촌구석에 생겨난 큰 길을 따라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고, 늘 상 처음에는 다방 하나, 그리고 재소자용 물건 파는 가게 하나 겨우 만들어져 이웃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부산한 삶의 너울이 펼쳐지고, 이윽고 그 너울이 커져 삽
시간에 교정시설을 포위할 때 쯤이면, 어느새 불편한 이웃으로 흰 눈 흘기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관례인양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우리를 환영하는, 일찌감치 교정시설의 유치를 위해 노력하는 지방의 소도시들은 따로 있었다. 그 아이로니컬함에 묻은, 인구절벽의 위기에 맞닥뜨린 지방행정의 절절함이, 오히려 우리에겐 굽은 등을 펴주는 소박한 위로인양 다가들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었다. 
강원도의 영월교도소 등 지방의 몇몇 교정시설이 그렇게 하여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감소가 심각한 경상북도 영양군의 경우는 물론, 이미 교정시설이 4 곳이나 설립되어 있는 청송군에 이르기 까지 부지의 제공을 조건으로 교정시설의 유치를 원하는 지역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수 백 명 직원과 그 가족들로 인한 지역인구 증가 및 면회객 등 유동인구 증가에 따른 지역상권의 활성화를 담보하니, 교정시설 유치는 당해 지방의 명운을 걸고 도전해 볼만한 과제일 듯 보여 지기도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닐 만큼 지방소멸의 위기 대응은 이미 목전에 다가든 급박한 숙제일 것이었다.
전국의 읍면단위 초중등학교가 연일 폐교의 위기에 직면하는 것과는 달리, 청송군 진보면 진보초등학교는 지방학교 중 유일하게 교실을 증축하고 교사를 증원 배치하여 왔었다. 또한 경상북도에서 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교라는 풍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청송군 진보면에 교정시설이 4 곳이나 연차적으로 설립되어 왔었기 때문이고, 아울러 교사들의 선호함은, 학생들이 많고 또 학부모들로 인한 불편한 시달림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교정시설이 백안시되거나, 혹은 지방소멸의 위기에 얹히어 환영을 받거나 그 어느 쪽의 상황과 마주하더라도, 그러나 우리들의 퇴로는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교정시설이 퇴로를 끊기지 않고 이르는 길의 끝은 늘 상 그린벨트, 곧 개발제한구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과장이 화급히 들어와 보고하기를, 국토부에서 개발제한구역법 시행령을 개정하는데, 개발제한구역내 건설 허가시설 중 경찰훈련시설, 국방. 군사시설은 포함되고 교정시설이 빠져있다고 하였다. 

큰일 날 일이라 관계직원들을 보내어 재차 확인하고 교정시설이 제외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라 일렀건만, 올라오는 보고란 게 접촉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치미는 화를 힘들게 누르고 국토부의 관계국장에게 전화를 돌리게 했더니, 전화를 받는 자가 마침 오래전의 국방대학교 동기이고 졸업논문의 지도교수 또한 같이하며 막역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뜻밖이라 반가워 인사를 나누자니, 그렇지 않아도 교정관계일로 부탁할 일이 있었지만 망설이고 있던 터인데 잘되었다고 말하고서는, 어쩐 일이냐고 물어 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서로간의 애로사항을 흔쾌히 수렴하고 물물 교환하듯 해결 방안 또한 손쉽게 나누었다. 그래서 잃어버릴 뻔 했던 교정의 퇴로를 운 좋게 찾아 덧붙였으니, 수정된 그 조항의 문구가 “국방.군사시설 및 교정시설” 이었다. 하마터면 막다른 길로 몰릴 뻔한 위기는 면했으나, 왠지 티처럼 끼인 듯한 뜨악한 기분은 좀처럼 씻겨지지 않았다.

이태희 (전 교정본부장/현 사단법인 대한민국 재향 교정동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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