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14년에 집필한  『업적록』이 새겨진 청동판, 출처 = Wikimedia Commons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14년에 집필한  『업적록』이 새겨진 청동판, 출처 = Wikimedia Commons 

“로마제국이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계자 선정이 중요하다. 승계가 원활하면 제국이 지속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통치하면서 후계자 문제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얄궂은 운명은 그의 뜻과 계획을 피해갔다. 결국,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2대 황제로 낙점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재혼하기 전에 이미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어떻게 후계 구도를 마무리했을까. 
꼼꼼한 성격의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1년 전부터 후계자 선정을 준비했다. 그의 준비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철저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최고 통수권을 주어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했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내전이 일어나 14년 동안 진통을 겪었다. 이런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공동 통치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여 후계 구도를 완성했다.

서기 14년 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후세에 남기고 싶은 내용을 담은 『업적록』을 마무리했다. 역사가 몸젠은 『업적록』을 ‘비문들 중의 여왕’이라고 명명했다. 그만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료다. 꼼꼼한 성격의 아우구스투스는 장례식 절차 내용도 문서로 만들어놓았고, 유언장 역시 작성해 놓았다. 한 마디로 “죽을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서기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 놀라(Nola)에서 76세의 나이로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허약한 체질의 아우구스투스가 76세까지 장수한 것은 로마제국의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40여 년 동안 1인자로 있으면서 로마의 시스템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제국 통치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여제사장에게 맡겨진 유언장이 원로원에서 개봉되었다. 

유언장에는 군사력과 세금을 비롯하여 제국 전체의 현재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과 군단 주둔지,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 총액, 각종 간접세 중에서 아직 납부되지 않은 액수까지 적혀 있었다. 심지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물어볼 수 있는 담당자 이름까지 기록해놓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유언장에도 그대로 묻어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하고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에드워드 기번은 “공화정시대는 존경할 만하지만 제정시대에 접어들자마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토인비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늦추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공화정 체제와 제정 체제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다. 공화주의자였던 타키투스는 “최악의 공화정이 최선의 제정(帝政)보다 낫다”며 공화정을 극찬했다. 그러나 “속주에서는 제정에 대한 평판이 더 좋았다”고 평가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내가 물려받은 로마는 '벽돌'로 되어 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사재를 털어 공공건물을 지어 희사하는 데 앞장서서 지도자들의 재산을 사회 환원하는데 모범을 보였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평가를 내렸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의 재위 기간 중 로마 사회의 모든 구석에 미치는 개혁들을 단행했다. 조급하게 많은 것을 이루려고 덤비지 않고 점진적인 조치와 선례에 입각한 체계적인 작업에 의해 '개혁'에 성공했다. '복합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어 '역동적인 조직문화'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옛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최상급 신분의 지위들을 많이 만들어 '원로원 의원'을 인재로 활용했다. 경제계 인사인 '기사 계급'을 실세의 지위들로 끌어들여 체제의 충직한 집단으로 만들었고, 신인들로서 원로원 신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노예도 '해방노예'로 신분 변화의 기회를 열어주어 전문화해가던 행정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존중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관리했다. 그가 후계 시스템을 '원수정 체제'로 만든 이유도 바로 “원로원과 시민을 존중하면서 통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자신이 솔선수범하면서 후계자들이 실천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63- 서기 14)가 막을 내리고,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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