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운다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 서기 14-37) 흉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 서기 14-37) 흉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Tiberius)의 통치를 거치면서 반석처럼 견고해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이렇게 시작한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거쳐 제2대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의 가계인 율리우스 가문과 티베리우스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합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탄생했다. 

로마 황제에 정식으로 즉위하려면 전임자의 지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라틴어 문장 SPQR은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출범할 때 로마의 주권자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SPQR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부를 이르는 말로,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로 사용되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까지 다루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기원전 14년에 티베리우스가 취임한 후 가장 먼저 한 결정은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의 선출 장소를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미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유권자 수가 500만 명이 되었는데 수백만 명이 모인 민회에서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가 예산은 긴축 재정을 실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금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공공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단 2건의 공공사업을 벌였을 뿐이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신전이다. 신격이 된 선황에게 신전을 지어서 바칠 필요가 있어서다. 다른 하나는 보수가 필요한 품페이우스 극장을 개축한 것이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일을 중단했다. 로마인들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즐겁게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검투사 시합을 비롯하여 다양한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종교 행사를 겸해서 열리는 것 외에는 구경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인기영합주의 거부하고 긴축 정책 추진

티베리우스는 특히 검투사 시합을 싫어했다. 시합 도중에 죽을 확률이 높아서 많은 지식인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에 서민들은 검투사 시합을 무척 좋아하고 열광했다. 더구나 검투사 시합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인기 영합주의를 배제하고 로마제국의 현실과 앞날을 고려하며 긴축 재정 정책을 펼쳐나갔다. 

선대 황제 때처럼 똑같은 규모로 지출이 계속되면 재정 압박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시민권 보유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재정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인기 하락을 감수하고 긴축 재정을 지속해나갔다. 당연히 시민들에게 인기는 떨어졌다. 

티베리우스에게 부과된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북쪽 방위선을 '라인 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엘베 강'까지 확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카이사르는 라인 강으로 규정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엘베 강까지 확장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서기 15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와의 전쟁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는 게르만군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수도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게르마니쿠스는 “1년만 더 전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면 엘베 강까지 제패할 테니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는 로마로 돌아와 화려한 개선식을 치렀다. 이로써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만 정복은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를 두고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가 질투심에서 자신이 이미 손에 넣은 승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평가와는 달리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북쪽 방위선을 엘베 강이 아니라 라인 강으로 확정했다. 

게르만 전선을 마무리한 티베리우스는 동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게르마니쿠스의 임지를 라인 강변에서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옮겨 동방 문제를 마무리하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동방 정책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전략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서기 17년 게르마니쿠스에게 로마제국의 동부 전역에 대한 최고 통수권을 주었다. 

31세가 된 게르마니쿠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로서 티베리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차기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딸한테서 태어났고,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초대 황제의 외손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게르마니쿠스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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