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운다

서기 15-16년에 주조된 티베리우스 황제의 금화 동전
서기 15-16년에 주조된 티베리우스 황제의 금화 동전, 출처 = Wikimedia Commons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어렵다.” 
창업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는 뜻이다. 어느 나라든 초창기 3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로마제국은 행운이었다. 

카이사르는 제국의 청사진을 설계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로마제국의 기본틀을 마련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기반 위에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서기 14-37)는 선대의 시스템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티베리우스는 경제사회 정책에서는 포퓰리즘을 거부하고, 긴축 정책을 실시하여 재정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탁월한 인사 능력을 발휘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하여 능력주의 원칙을 중시했다. 군단장에는 군사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고, 행정관에는 행정력을 갖춘 사람을 발탁하여 능력을 펼치도록 했다. 속주 총독에는 명문 귀족 출신을 활용했다. 속주 출신이라도 로마 시민이 되면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싫어했지만 “어떤 황제라도 티베리우스만큼 교묘하게 인선을 해낼 수는 없었다”며 인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티베리우스는 또한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기 25년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여 신전을 세우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한 말이 있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카프리 섬에서 은둔정치 시작
티베리우스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서기 27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권력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고 미련 없이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으로 들어갔다. 가족 간의 불화로 불편한 마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에 대해서도 실망하여 은둔 정치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타키투스는 “잔인하고 방탕한 본성을 숨기기 위해, 늙은 외견상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그의 어머니의 오만한 기질이 싫어서 은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은둔했다고 해서 정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측근 정치를 하고, 필요할 때는 서신을 통해 통치를 했다. 로마는 당시 로마가도가 발달하여 정보 수집이 가능했고, 명령 전달 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다. 

그가 은둔한 직후, 큰 사건이 2건이나 발생했다. 로마 근교의 경기장이 붕괴되어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 로마의 일곱 언덕의 하나인 첼리오 언덕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이처럼 대형 사고를 원만하게 수습한 티베리우스는 은둔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은둔을 계속하면서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의 측근 정치가 지속되었다. 
서기 29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통의 편지를 원로원에 보냈다. 


“고인의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르라. 사후에 주어지는 많은 명예도 가능하면 줄이라. 특히 어머니를 신격화하는 일은 하지 말라.” 

서기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세야누스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후계자의 욕심까지 생긴 것을 안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고 사형에 처했다. 

티베리우스는 승계를 염두에 두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피가 흐르는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훗날 칼리굴라 황제)’를 카프리 섬에서 함께 살도록 했다. 세야누스의 궁중 음모 전략에 걸리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타키투스는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 영악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하면서 “가이우스만큼 훌륭한 노예도 없었지만, 그만큼 무서운 주인도 없었다”는 말이 생겼다고 소개했다.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다. 그는 원로원이 자신에게 주려고 했던 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는 겸손함을 지녔다.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청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공화정과 민주 원리를 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었다. 역사가 몸젠은 “티베리우스는 로마가 가졌던 가장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제거, 궁정 음모 사건, 측근 세야누스의 권력 남용, 카프리 섬 은둔 기간에 나돌던 무절제한 성적 타락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 등으로 인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등 고대 역사가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는 로마제국의 시스템을 유지 보수하여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의 기반을 구축했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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