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1978년 가을, 대구시 수성동. 고등학교 2학년인 여학생 B양이 12일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병원에서는 B양의 상태에 대한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속수무책이었고 병상을 지켜온 가족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왕진 요청을 받고 대구로 가는 동안 B양의 큰아버지에게 들은 바가 있어 바로 B양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따님이 월경에 이상이 있다고 한적 없었습니까?”심각하게 이상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월경 때가 되면 아주 우울해 하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해 걱정이 많았다고 답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도 갑자기 화를 내서 제 오빠와 크게 다투었다고 했다.

나는 침통에서 침 끝이 삼각추 모양이고 침 날이 세모난 삼릉침을 꺼냈다. 신장의 기운이 부족한데다 크게 성을 내어 간을 손상시켜 쓰러졌으니 간경(肝經)을 사혈하면 깨어나리라.
나는 B양의 엄지발가락 바깥쪽 발톱뿌리에 있는 혈자리를 잡고서 보호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 발톱 옆에 있는 혈자리를 사혈해 피를 조금 뺄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정확하고 날렵하게 침을 찔렀다. 간의 양기를 내려 막힌 것을 소통시키는 간의 기능을 깨워야 하는 일이었다. 피가 방울방울 봉긋하게 솟아나더니 조금 흘러내렸다.
잠시 후 B양의 엄지발가락이 약간 꿈틀했다. 그리곤 곧 눈을 떴다.
“야야! 이 가시나야!“ 
B양의 아버지가 기뻐서 소리쳤다. 그제야 식구들이 일제히 병상 가까이 달려들었다.

가족들은 B양을 당장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올 테니 치료를 해달라며 사정을 했다. 이젠 깨어났으니 영양을 잘 섭취하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으나 그들은 나더러 돌봐달라고 졸랐다. 빠른 원기 회복을 위해 내가 뜸자리를 정해주고 가족들이 날마다 뜸을 떠주면 되는 일임에도.
하는 수 없이 B양의 부모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B양 가족이 퇴원수속을 위해 만난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단 병원에 입원했으면 무슨 병인지는 알고 나서 퇴원을 해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B양의 어머니가 의사 앞으로 다가서며 따졌다. 
“그럼 이제까지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주사 놓고 했단 말이에요?”
의사는 말문이 막히는지 잠시 대답을 못했다. 
나는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인가. 침 한방이면 되는 것을.

<구당 김남수 옹의 책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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