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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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열이 나서 몸을 벌벌 떠는 손녀를 데리고 나에게 왔다. 손녀는 몸이 마르고 핏기도 없는 것이 아주 허약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사정을 했다.
“이 애를 살릴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 할아버지는 어느 도립 병원의 원장을 지내고 정년퇴임한 뒤에는 동네에서 의원을 하고 있는 의사였다. 중학교 1학년인 손녀는 종합 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데리고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이름난 전문의는 다 만나본 터였다. 그러나 손녀를 고칠 방법이 거기에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J대학의 P교수가 소개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P교수는 뜸으로 디스크가 완치되고 난 뒤 주위에 병이 든 사람은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뜸을 권하는 자칭 뜸의 전도사였다.
나는 손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잘 먹는 음식보다 안 먹는 음식이 더 많지요?"
할아버지는 손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는 안 먹고 못 먹는 음식 투성이다. 음식을 많이 가리고 편식하는 습관이 병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조혈(造血)능력이 감소하는 병으로 피 속에 들어있는 여러 성분, 특히 혈소판의 양이 감소한다. 혈소판이 부족하면 각종 빈혈 증상이 나타나고 피가 났을 때 지혈이 잘 되지 않고 감염성 질병에 쉽게 걸리게 된다.
할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딸이 병을 앓고 있는데 내가 의사면서 쳐다볼 수밖에 없어 더 답답합니다. 기껏해야 수혈해서 피를 넣어 주는 방법뿐이니... 의학이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쓰는 어떤 의술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전통의술이건 현대의학이건 다 마찬가지이지요. 눈으로 병의 원인을 확인하고 공격하는 현대의학은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방어가 최우선인 전통의술은 시간을 다투는 공격엔 약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같은 의술자로서 의사 할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의술자로서 좌절감을 느낀 적이 많았다. 뇌를 다쳐 꼼짝 못하는 식물인간, 엉망으로 처참한 몰골이 된 환자, 급작스럽게 죽는 사람 등 그렇게 심각한 환자를 보고서도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할 때 마다 그대로 보따리를 싸들고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병을 보고도 고치지 못하는 내가 무슨 의술자란 말인가. 고칠 방법이 있건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휩싸여 허탈해지곤 했다.(다음호에 계속)

구당 김남수 옹의 책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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