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칼리굴라 황제(서기 37-41)의 흉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3대 칼리굴라 황제(서기 37-41)의 흉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모든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서기 37년, 25세의 젊은 칼리굴라가 3대 황제로 즉위할 때 원로원과 로마의 모든 시민이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인기 없는 77세의 노인 황제가 퇴장하고 젊은 황제가 등장했으니, 그 자체로도 민심은 일시에 변화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황제에 올라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칼리굴라는 구세주와 같았다. 칼리굴라의 아버지는 게르마니쿠스이고,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녀인 아그리피나가 아닌가.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병사들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환호했다. 칼리굴라는 어렸을 때 로마제국의 국경인 라인 강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병영에서 자랐다. 그는 병영에서 로마군 군화인 '칼리굴라'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유아용 구두를 신고 다녔다. 이런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별명이 이름이 된 것이다. 칼리굴라의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근무지가 바뀌자, 칼리굴라도 그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자 로마로 돌아왔다. 

칼리굴라는 경제적으로도 행운아였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흑자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것이 안정된 상태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황제에 취임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가 가졌던 모든 대권을 이어받은 젊은 황제는 원로원에서 시정 연설을 하면서 “티베리우스 시대와는 정반대의 통치를 하겠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반대의 통치란 티베리우스는 긴축하면서 인기 없던 정책을 펼쳤지만, 자신은 확장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즉, 시민에게 부담이 되는 세금을 폐지하고, 축제를 열고, 검투사 시합과 전차 경주 대회를 부활시키는 등 자신의 인기를 높이는 화려한 일에 집중했다. 

반면에 속주 통치나 변경 방위 등 일반 시민들이 관심 없는 분야에서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민중이 관심 있는 일들은 포퓰리즘을 도입하고, 민중의 관심권 밖에 있는 일들은 기존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양면 정책 덕택에 로마제국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즉위한 지 7개월 되던 때 칼리굴라는 지독한 열병을 앓은 후 그 후유증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 영향으로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인간 세계에 나온 신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는 유피테르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항상 시민들의 인기를 의식했다. 포퓰리즘만이 정책 추진의 기준이었다. 결국 인기를 모으기 위해 추진했던 정책들이 부메랑이 되어 국가 재정은 파탄났다. 직전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물려받은 흑자 재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인기 정책은 재정과 맞물려 있다. 재정이 없으면 선심성 정책도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다. 맹자가 말했듯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즉 재산이 일정하지 않으면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다. 국가 재정이 바닥나자, 칼리굴라는 재정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찾아 나섰다. 심지어 땔감에까지 세금을 징수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세금을 부과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인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것이 정치와 경제의 냉혹한 차이점이다. 정치는 말로 하지만, 뒷받침은 경제의 몫이다. 경제의 뒷받침 없는 정치는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게다가 자신을 신으로 생각한 칼리굴라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패악과 패륜을 저지르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짐승 밥으로 내던지고 근친상간을 일삼았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의 기행과 잔인한 행위를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상세하게 기록했다. 칼리굴라는 어느 날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거기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첨하느라 “티베리우스가 죽고 난 뒤 폐하가 황제가 되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제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그렇다면 유배를 간 사람들도 자신이 죽기를 바라며 기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하에게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유배자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정신병적인 행동은 어디서 나왔을까? 수에토니우스는 ‘과도한 자신감’과 ‘지나친 소심증’을 가진 모순된 성격적 결함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며 신들을 경멸했지만, 멀리서 천둥소리만 들려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는 나약한 사내였다는 것이다.

황제의 문제점은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문제는 항상 가까운 곳에서 생기는 법이다. 늘 인기에 연연하는 칼리굴라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서기 41년, 연극 관람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최측근 근위병 대대장인 카이레아 등 몇몇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황제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에 비극을 맞은 것이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카이레아는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게르마니쿠스의 동생)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돌아가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황제)라는 환호를 받았다. 원로원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상황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원로원은 기정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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