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해결된다 :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

차라리 걷자

7세기 영국 시인 존 드라이든은 극작품 <오이디푸스>에 “음악이 있는 동안 근심은 사라진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나오기 이미 1000년도 전에 로마인들은 “걸으면 해결된다”고 일갈했지요. 이 금언은 기원전 4세기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했던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솔비투르 암불란도는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때 방구석에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짜지 말고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걷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하는 인간)도,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하는 인간)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도 호모 암불란스(걷는 인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고유성은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인간’보다 자코메티의 ‘걷는 인간’에 더 잘 각인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지쳐갈 무렵 집 가까이 있는 여의도 샛강 숲길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샛강 숲길을 걸으며 코로나 블루를 이겨낼 수 있었고, 평범한 일상에도 크게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걷다가 여의샛강생태공원 위탁운영기관인 한강조합의 도움을 받아 2022년 11월 시민모임 ‘샛강 숲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걷기로 기부문화 확산을

당시 샛강 숲길로 전문가를 초청해 시민들과 다섯 번의 걷기를 했는데, 마지막 초청 강사는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이었습니다. 마침 고희의 나이였는데 1년 전 여름 평생의 버킷리스트인 ‘고향사랑 평화기원 걸어서 고향까지 500km’ 프로젝트를 완수한 터였습니다. 그는 분단의 상징인 임진각에서 고향 경남 합천까지 16일간 하루 30km 넘게 72만보를 걸었습니다. 1km마다 100만원, 도합 5억원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지켰습니다.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걸은 그의 염원에 공감한 사람들이 연인원 155명 동참했고, 그들이 약정한 기부금액도 3000만원을 넘겼습니다.

걷기 행사를 마치고 신길동 카페에서 정인조 이사장은 참가자들에게 걷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 하나만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한 참가자가 “틈만 나면 걷고, 한번 걸으면 오래 걸을 때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걷기의 효과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라고 묻자 정 이사장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나는 뭔가 하나의 화두를 세우고 걸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창업과 사업 등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로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걷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오래 걷다 보면 걱정과 근심, 화나는 일도 자연스럽게 삭이게 됩니다. 그러면 후회할 판단을 절대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나의 깊은 내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몰입하고 몰입하니 다섯 살 시절의 기억까지 떠올랐습니다. 종두 접종을 받고 어머니 등에 업혀 오다 ‘노루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노루가 산등성이로 뛰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걷기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치유와 명상이 되고, 함께 걸으면 소통과 축제가 됩니다. 장 자크 루소도 “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건강, 행복, 자기통제력

‘샛강 숲길을 걷는 사람들’ 시즌1 프로그램을 마무리할 때의 일입니다. 참가자들에게 ‘샛강의 고마운 점 다섯 가지’를 감사카드에 적은 다음 읽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아내가 낭독한 감사 목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삭막한 도시의 휴식처가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사시사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 감사합니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와의 산책 코스가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운동하기 싫어하던 나에게 운동터가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여기엔 이런 문구도 들어 있었지요. “부지런쟁이 남편을 새벽마다 반겨주어 감사합니다.” 프로그램 봉사자로 참가한 아들도 ‘샛강의 고마운 점 다섯 가지’를 적었는데, 맨 마지막에 이런 문구를 덧붙였더군요. “아버지에게 무한한 활력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배우 하정우의 책 <걷는 사람, 하정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것이다.” 실제로 하버드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들 중 하나에 걷기가 포함됩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연구에서도 걷기는 재미와 의미 모두를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행복 활동임이 밝혀졌습니다. “걷기와 운동은 건강, 행복, 자기 통제력이라는 세 가지 보물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보기 드문 일상적 활동이다.” 하정우는 머리가 복잡해지면 이런 말을 내뱉는다고 합니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한강조합이 주최한 ‘2023 샛강포럼’이 2023년 11월 15일부터 7주에 걸쳐 여의샛강생태체험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강사인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샛강 공동체와 마음의 생태계’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 맺기’가 절실하다. 샛강에서 ‘낯선 사람들이 즐겁게 교류할 수 있는 마당’을 열자. 적절하게 열린 공간에서 ‘인간적 매력과 시민적 덕성이 자라나는 어우러짐’을 만들어내자. 샛강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공간’이다. 샛강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환대의 자리’다. 우리는 샛강에서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와 마주칠 수 있어야 한다.”

정지환(감사경영연구소 소장)

소중한 글입니다.
"좋아요" 이모티콘 또는 1감사 댓글 달기
칭찬.지지.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