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운다

서기 44년 경에 주조된 클리우디우스 황제의 기념 금화(Gold Aureus), 출처 = Wikimedia Commons
서기 44년 경에 주조된 클리우디우스 황제의 기념 금화(Gold Aureus), 출처 = Wikimedia Commons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걸을 때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이러한 신체적 결함 때문에 그는 일찍이 제위(帝位) 승계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머리가 비상한 것을 알고 그에게 좋은 교사들을 붙여주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여 역사 연구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스승이 바로 고대 역사가인 리비우스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는 소년 시절부터 로마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리비우스가 격려했고, 술피키우스 팔라부스가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칼리굴라가 갑자기 살해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생각지도 못했던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가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재위 서기 41~54)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황제 살해범을 처형하는 일이었다. 황제 체제를 유지하는 한, 살해범을 살려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주동자인 대대장 카이레아만 처형하고 다른 가담자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역사가 황제는 공직자의 경험이 없어 리더십을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황제가 할 일과 일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었다. 독서의 힘이 그를 능력있는 황제로 만들었다. 우선 칼리굴라가 남긴 재정 파탄을 건전 재정으로 전환하는 일에 앞장섰다. 칼리굴라가 폐지한 ‘1퍼센트 매상세’를 부활시키고,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출은 가차 없이 삭감했다. 이런 노력으로 재정을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복잡한 제국 경영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자신을 도울 ‘비서관 체제’를 구축했다. 비서관은 해방노예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해방노예에게 역할을 분담시켰다. 편지 담당, 회계 담당, 청원서 담당, 필기 담당, 지식과 정보 담당 등의 비서관을 두어 황제의 임무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칼리굴라가 저질렀던 실정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했던 제도로 다시 복원시켰다. 이를 통해 ‘제정 체제’에 불신을 갖고 있던 원로원의 공화파 의원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촉발된 유대인 문제 역시 유일신을 믿는 그들의 특성을 인정하여 유대 민족의 반란을 처리했다. 

브리타니아(영국)를 정복하여 식민지 구축

군대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서기 43년 로마군 4개 군단을 이끌고 직접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영국)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칼리굴라가 시작한 로마 수도교 공사를 마무리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서쪽 티레니아 해에 면하고 테베레 강과 연결되는 오스티아 항구를 건설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국세 조사를 실시한 지 34년 만에 다시금 실시하여 조세와 군사력의 기초 데이터를 확보하기도 했다. 

비서관 체제는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해방노예 출신의 비서진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국정에 폐해도 생겼다. 특히 해방노예 3인방으로 불리는 나르키수스, 팔라스, 칼리스투스에 대한 로마 지도층 인사들의 원망과 증오를 샀다. 

게다가 황제는 무미건조한 성격에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오스티아 항구 건설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황궁을 비운 사이, 황후 메살리나의 중혼죄, 즉 이중 결혼 사건이 일어나 황제의 측근이 황후를 살해하는 비극도 생겼다. 

홀몸이 된 클라우디우스는 다시 재혼을 결심한다. 클라우디우스는 황후를 고르는 일도 비서진에게 맡겨 추천을 받았다. 많은 후보 중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는 아그리피나가 선택되었다. 아그리피나는 어머니와 이름이 똑같아서 역사가들은 둘을 구분하기 위해 어머니를 대(大)아그리피나, 딸은 소(小)아그리피나라고 불렀다. 클라우디우스의 아내는 소아그리피나였다.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동생이고, 클라우디우스에게 조카가 된다. 숙부와 조카 사이의 결혼은 어려운 일이지만, 아그리피나는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여자이기에 적극적으로 희망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도미티우스'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이름을 '네로'로 바꾸었다. 

도미티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클라우디우스도 자신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5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도미티우스를 자기 딸 옥타비아와 약혼시켜 양자로 삼고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주고 계승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준비를 마친 후 황제에게 독버섯을 먹여 사망하게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의 야망에 희생양이 되어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네로 황제’가 등장한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소중한 글입니다.
"좋아요" 이모티콘 또는 1감사 댓글 달기
칭찬.지지.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