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컴퓨터 역사의 산 증인-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 인터뷰

1956년 존 매카시가 '인공지능(AI)'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대화형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더 이상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인공지능 개발에 앞장서 온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그 중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은 한국 소프트웨어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IBM에 입사하여 코볼 언어 개발팀에 참여했던 이 회장은 한국 최초 컴퓨터 도입과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주도하며 한국 IT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17회 소프트웨어날에 정보통신 분야 최고인 금탑산업훈장으로 그의 공로에 보답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이 회장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후배들에게 "광활한 인공지능이라는 소프트웨어 바다에 뛰어들어 마음껏 도전하십시요. 그리고 전력투구하십시요"라고 당부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기술입니다. 이 회장의 뜨거운 메시지를 기억하며, 후배들이 인공지능 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당시의 저는 아주 행복한 유소년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나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울산 천석꾼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습니다. 울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당시 최고의 명문인 서울의 경기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고1때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어 회화를 좀 할 수 있었기에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미군 부대의 통역으로 일을 하였고 그 인연으로 추천을 받아 서울대 사회학과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시골의 무학 촌로 아버님이시지만 높은 교육열로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라는 아버님의 평소의 생각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어떻게 정보통신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고 코볼 언어를 개발하는 팀에 들어갈 수 있었나요?

1958년 여름 경제학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지만 취직이 안되어 미시간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의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취업이 되었습니다. 연구소의 컴퓨터는 IBM의 첫 기종인 IBM650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종이었습니다. 오퍼레이터로 일 하는 동안 컴퓨터에 재미를 느껴 대학원 학생으로 회계학 대신 컴퓨터 개론을 선택 과목으로 신청하여 들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컴퓨터로 한평생 외길을 걷게 된 출발점이었지요.

그리고 대학원 졸업 무렵 주임교수가 자네는 학자 자질은 아닌 듯하다며 취직을 권했습니다. 은행에 취업이 되었으나 단순 반복적인 일이 싫어 사표를 내고 저는 'IBM 입사 한국인 1호'로 급여는 은행보다 100달라 적었지만 그때 IBM을 선택했던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 당시 100달라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돈보다는 일하는 재미를 선택한 것이지요.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일에 전력투구하라', '불가능은 없다'를 배운 것이 훗날 한국 IT 개척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입사하며 새로 생긴 IBM 소프트웨어센터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기계어를 알고 있어 코볼(Common Business Oriented Language) 개발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사장이 팀원 한 명씩 안아주며 회사의 운명이 너희들에게 달렸다고 했습니다. 그 때 모두 참 열심히 코볼 언어를 개발하는데 매달렸었지요. 아주 보람 있는 일이었지요.

▶어떻게 IBM을 한국에 진출시키고,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인 FACOM222를 도입하게 되었는지요?

휴가를 얻어 7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 보니 당시 한국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에 저는 IBM 왓슨 쥬니어 회장에게 직접 한국에 IBM이 진출하면 좋겠다는 편지를 무턱대고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왓슨 회장은 휴가 중에도 회사 일을 하고 있는 저에게 감사하다며 부사장과 부장을 보내서 지사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실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지사가 설립되고 1963년 2월 IBM 한국대표가 되어 돌아왔지요. 2년 후 후임자에게 대표를 물려주고 IBM 본사 서비스 부서로 다시 돌아 갔습니다.

1966년 4월 아버지의 귀국 권유와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싶어 휴가를 내고 귀국했다가 한국생산성본부의 이은복 이사장에게 출국 인사차 들렸다가 생산성본부 산하 새로 설립된 한국전자계산소를 덜컥 맡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 도입 업무를 맡게 되어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통계국에서 1967년 6월에 도입한 IBM1401 보다 1달 보름 정도 빠르게 FACOM222를 도입하여 설치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 도입이었습니다.

▶KCC정보통신을 운영하시며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33세인 1967년 1월 KCC 정보통신의 모체인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 소장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후 1971년 키펀치 용역의 수출을 위해 한국전자계산(주)를 설립하여 대표를 맡았습니다. 당시 전산화로 일자리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은행 직원들이 전표 뭉치를 일부러 책상 속에 감추기도 하고, 회계가 투명하지 못하던 시대라 전산화로 투명하게 될 수 없는 사정이 있던 회사들은 전산화를 꺼려서 KCC가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여러 군데서 다시 봉급쟁이로 들어오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유니백에서 황송할 정도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아내에게 말을 꺼냈지요.

처음에는 좋아하던 아내가 “호화생활은 안해도 되니까 의미 있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왕 우리나라의 컴퓨터 산업을 일구겠다고 칼을 뽑았으면 좀 어려워도 계속해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지요. 그래서 유니백에는 지사장은 어렵고 고문을 하면 좋겠다고 하여 10만달러에 계약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KCC는 위기를 넘기고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아내의 지혜로움에 감사합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이며 자녀들이 모두 잘 되었는데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시켰나요?

대한민국 제1호 컴퓨터인 FACOM222를 도입하고 1975년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일본보다 앞선 일이었고 미국도 채용하지 못했던 체크 디지트(Check Digit)를 도입하여 잘못된 입력을 원천적으로 막았지요. 국가 안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사업하느라 바빴고 집 사람이 아이들 교육을 도맡아 했는데 기본적으로 미국식으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기 보다는 독립심을 제일 많이 강조했고 본인들이 알아서 자립해서 공부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최고 유공자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셨는데 훈장을 받으신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1967년 IBM을 퇴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제가 우리나라 정보 혁명의 씨앗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이후 5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남은 세월 동안 제가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니 아버님의 업으로 '이종하 장학금'을 만들어 학생들을 지원하고 저의 업으로 '미래와 소프트웨어 재단'을 만들어 창업융합 생태계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1977년 울산 최초의 종합실내체육관을 지어서 기증하셨는데 이후 2021년 울산시에서 노후화된 종하체육관을 재건축 추진중에 재정난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가 사재 330억을 들여 창업/문화/교육 복합공간인 연면적 19,905m2의 종합이노베이션센터를 새로 지어서 울산시에 기증하려고 공사가 막바지 단계입니다. 그리고 제 모교인 서울대학교 문화관 리모델링 사업에도 100억을 기증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늘 "네가 가진 재산 모두가 네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로부터 위탁 받은 것이다"라고 가르치셨고 아버지께서도 그대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소프트웨어는 인공지능 시대라는 이름으로 활짝 열였습니다.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광활한 인공지능이라는 소프트웨어 바다에 뛰어들어 마음껏 도전하십시요. 그리고 전력투구하십시요”라고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제갈정웅 기자

 

소중한 글입니다.
"좋아요" 이모티콘 또는 1감사 댓글 달기
칭찬.지지.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