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다

로마제국 5대 황제 네로의 흉상, 출처=Wikimedia Commons
로마제국 5대 황제 네로의 흉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로마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로마제국 5대 황제 ‘네로(재위 서기 54~68)다. 카이사르는 몰라도 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네로 황제는 “인류의 파괴자”, “세상의 독”, "최악의 폭군"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으나 재위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며 인기를 누렸다. 

서기 54년 황제에 즉위했을 때 네로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했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임 클라우디우스 황제 체제에서 해방노예들이 설치는 모습에 신물을 느낀 까닭에 새 황제 체제에서는 비서관 정치가 없어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또 환갑이 넘은 역사가 출신의 황제는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젊은 황제의 등장은 참신한 느낌을 주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네로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어머니 아그리피나이다. 그녀는 불타는 야망과 집념을 가지고 킹 메이커가 되었다. 사실 아그리피나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3살에 지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랐다. 
친오빠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그녀는 섬에 유배되고 말았다. 이런 역경에서 그녀는 오히려 권력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부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가 되어 네로를 황제로 즉위시킬 수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위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왕 교육을 위해 유명한 철학자를 선생으로 모셨다. 당시에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미움을 받아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아그리피나는 황제를 설득하여 세네카에게 추방 해제령을 내리고 아들의 스승으로 모셔와 제왕 교육을 시켰다. 

세네카의 도움 덕분에 출범 초기 5년 동안 네로는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행한 네로의 연설은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정부를 매우 안정되게 운영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나는 통치권을 아무 탈 없이 행사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조언자와 모범적인 인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라며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서기 59년, 네로가 간섭하는 어머니를 살해한 후 폭정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세네카는 폭군을 선도하려는 이상과 폭군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마침내 서기 62년,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하고, 네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64년부터는 궁정에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품었던 네로는 65년에 발각된 암살 음모에 세네카의 조카인 루카누스가 연루되자, 세네카와 그의 가족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네카는 위대한 철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인생이 왜 짧은가』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권리”라고 했다. 그는 “현자는 자신의 생명이 지속 가능한 시간까지가 아니라 자기가 생존하려고 할 때까지만 생존하는 것”이라며 자살을 자유로 통하는 통로라고 변호하기도 했다.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명령받은 세네카는 자신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스승 세네카의 죽음 이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된 황제 

네로는 세네카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가기 시작했다. 네로는 원래 정치보다는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옆에서 충고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네로의 주된 성격적 특징은 인기에 대한 억누르기 힘든 욕망과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눈을 사로잡은 사람들에 대한 불타는 질투”라고 설명했다. 네로는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라고 여겼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사는 대중예술가였다. 그는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를 인용하고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다. 

뿐만 아니라 네로는 대중 앞에서 직접 류트나 리라 같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의 박수 소리에 만족하며 많은 돈을 낭비했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타키투스는 “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서기 60년, 그리스의 올림픽을 모방하여 ‘네로 제전’ 축제를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고 말았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를 연주하고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 네로가 직접 출전했다. 우승은 항상 네로의 몫이었다. 

네로는 이 축제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낭비했다.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고, 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원로원과 귀족들은 ‘철부지 황제’라며 싫어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네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다. 그는 유능한 장수인 코르불로를 동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르티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양국 사이에 평화가 이어지게 했다. 네로는 국가 안보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면서 사악한 폭군의 길로 들어섰다. 

양병무 기자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감사나눔연구원 양병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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