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에의 회고

32년 교도관의 삶을 사는 동안 무려 일곱 명의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 위치했고 또 물러갔었다. 어느 대통령이든 자신의 정부가 추종하고 또 거두어야 할 우선적 가치와 과제의 수행만으로도 결코 녹록지 않은 땀흘림이 요구되었을 것임에도,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독 마음의 한
틈을 비워 교도관을 보듬고 격려해 마지않던 분들이 있어 고마웠다.
바로 전두환, 김대중 등 두 분의 대통령이다.

돌이켜 보노라면, 세월의 흐름이 날짜가 아니라 매 순간 역사로 다가들었던 1980년 5월의 그 무렵에, 칼날같이 첨예한 대척점을 마주하고 섰던 두 사람이 아니던가. 그 어떤 상황과 사유의 교집합도, 공통분모도 없을 듯한 처지에서 똑같이 교정행정에 각별한 관심과 격려를 배려하였다면, 관점이 다를지언정 각자의 입장에서 가슴에 와 닿은, 교정에 대한 남다른 공감과 감응의 사유를 하나씩은 지니고 있을 터 이렸다.
혐오가 갈라놓은 세월과 의심이 가득한 시대의 소음마저 뛰어넘을 정도의 무게로.

시민군의 함성으로 뜨겁던 5월의 광주는, 그 열기의 뜨거움에 놀라, 제 자리를 지켜 부여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관공서 직원들 모두가 청사를 비우고는 흩어지고 말았었다. 
심지어 공안의 표상이라 할 검찰청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광주 시민이다” 라는 플래카드를 항복문서처럼 걸쳐 놓고 청사를 비워야 할 정도로 그때의 광주는 뜨거웠었다.

관공서라고 겨우 남아 있던 것이 비교적 시 외각에 위치했던 광주교도소 하나였다. 충직한 건지 우직한 건지 알 수는 없으되, 광주교도소 전 직원은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총기를 들고 시설 방호임무를 묵묵히 수행했었다. 
그 후 광주시위의 전말을 보고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교도관의 복무자세를 치하했고, 그 보상으로 최 상위 계급이 부이사관에 지나지 않던 교도관의 계급체계를 고쳐, 서울, 대구, 대전, 청송 등 대형교정시설 기관장의 계급을 이사관으로 한 직급 격상시켜 주는 파격적인 조치가 뒤따랐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전국 교정시설 기관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노고를 격려, 위무해 주었었는데, 이 때의 배려를 계기로 그것은 청와대의 연례행사로 고착되어, 대통령의 바뀜과 관련 없이 꾸준히 행해져 왔었다. 
그 덕분에 나도 기관장이 된 후 그 행사에 두 번 참석했었다. 어쩜 광주 민주화운동의 선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슴에 자부심을 담게 하던 그 모임은 노무현 대통령 때에 이르러 단 한번 모임을 가진 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치 귀찮은 듯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삶 어디에 교정이 그리 까탈스럽게 다가섰었는지 모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행태는 ‘사람 사는 세상’을 표방하던 그의 소탈해 보이던 외양과는 전혀 달라 모든 조직원들로 하여금 쓴웃음을 머금게 했었다.

그에 비해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기간의 구금생활 전력으로 인해 교정행정 전반을 꿰뚫고 있었던 터라, 비판적 시각이 상당히 누적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갇히고 지키는 장구한 세월이 오히려 역지사지의 감정과 마음의 접점을 보태어 준 것인지, 교도관을 대하는 눈빛이 참으로 따뜻하여 그 대틀의 풍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한 첫해에 교정기관장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요즘 교도소는 옛날과 달리 TV도 틀어주고 커피도 준다니 다시 한 번 가볼까 싶기도 하다.” 하고 농담을 던져 좌중을 웃게 하니, 잔뜩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교정기관장들의 입장을 미리 헤아려 주는 듯한 그 배려가 감사했었다. 
또한 배석한 교정국장을 향해 일부러 신분이 검사인지 교도관인지 물어 검사라는 대답을 듣고서는, 동석한 법무부장관을 향해 “내가 교도소에 있어 봐서 아는데 교도관이 아닌 검사가 교정행정의 전반을 두루 헤아려 이끌어 가기란 불가능할 터, 하루빨리 교정국장을 교도관으로 임명하라” 하고 지시했다.

그러나 법무부장관 이하 검사들이 그리 쉽게 손에 쥔 자리를 내어 놓을 리 없었고, 이듬해 교정기관장들의 청와대 방문 시 다시 대통령이 교정국장에게 그 신분을 확인 사살하니 그제야 두 손을 들고 항복했고, 비로소 교정국장 자리가 교도관의 몫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정치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춰하는 것”이라고 하던, 대통령 김대중의 내공과 인간적인 매력에 포로가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의 큰 마음넓이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을 전임 대통령으로 깍듯이 예우하여 청와대로 초빙하는 등, 역사적 심판은 처벌에 열중하는 것이기 보다는 각자의 가슴에 나누어 담아내는 것임을 몸소 실천해 보이기도 했었다. 
오죽했으면 훗날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의 퇴임 후 가장 좋았던 시절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기에 이르렀을까. 

어찌 했든 서로 범접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지니고 살아왔을 것만 같은 두 대통령이 각자 다른 계기였다 한들, 세상에서 잊혀 지기 쉽고 온통 울퉁불퉁한 직무들로 힘겨워하는 교정조직의 시련과 회환을 품어 주었던 고마움은 교정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는 말이 떠오르곤 하는 요즘이어서 돌아봄이 더욱 각별하다.

이태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현 교정대상 심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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