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에세이

) 소장(Ph.D)으로 마흔 이후 30년을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서드에이지 전문가다.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사랑의교회 사랑패밀리센터 책임자, 아버지재단 대표, CBS <기쁜 소식 좋은 세상>과 극동방송 <출발 좋은 아침>의 진행자, 문화일보 인기 칼럼니스트, 무엇보다 가족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40대의 가장이다.

대한민국 40대 인생 보고서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의 저자 이의수 남성사회문화연구소 소장이 본지에 한 편의 글을 보내왔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마흔에게 보내는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부부가 함께 꿈꾸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의미 있는 노후를 보내는 행복 전략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무엇을 끝내기에는 너무 이르면서도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 4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면 아직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기에 무언가를 끝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반면 서너 시간만 지나면 세상은 어둠에 잠기기에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또 너무 늦다. 그래서 오후 4시는 우리 마흔들처럼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다.
그 오후 4시 정각에 한 여자가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왔다. 순간 나는 잠깐 망설였다. ‘손님인가? 잡상인인가?’ 매장을 운영하는 나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나보다 한두 살 쯤 많아 보이는 그 여자는 한눈에도 정상에서 멀어 보였다. 흔히 하는 말로 ‘나사가 빠진’ 사람이었다. ‘이 동네에 정신 나간 여자가 한 명 있다더니, 저 아줌마인 게로군.’ 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그녀의 아래위를 살폈다.
마흔 서넛의 여자답지 않게 몸은 말랐지만 가슴은 비정상적으로 컸다. 임산부는 아니었지만 배는 남산만 했다. 복장은 더욱 황당했다. 커다랗고 요란한 장미꽃이 그려진 빨간 상의에 바지는 검은색 비로드였다. 바지를 얼마나 오래 입고 다녔는지 비로드가 바래 커피숍 조명 불빛에 번쩍거렸다. 아직도 저런 바지를 만드는가 싶을 정도였다.
눈 아래에는 기미가 심하게 끼었는데 정작 볼썽사나운 것은 한다고 한 화장이었다. 로션을 너무 발라 얼굴이 비로드 바지처럼 불빛에 번쩍였고 새빨간 루즈를 발라 그렇지 않아도 튀어나온 입술이 더욱 눈에 띄었다. 설마 나름대로 멋을 낸다고 낸 것인가? 손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백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눈에 악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그래도 눈동자 깊숙한 곳에 담긴 불안감과 주저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돈은 있나? 혹시 커피 마시고 돈 없다고 생떼를 쓰면 어떡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혹시 다른 손님한테 방해가 되어 손님들이 다 나가버리면 낭패 아닌가?’ 나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에게 동정심이 들었으나 장사를 방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침 가게 안에는 두 테이블의 젊은 손님밖에 없었고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한가한 시간이지만 곧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나사가 풀린 여자 하나 때문에 나의 아름다운 가게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잘못 들어왔기를 바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저…….”
“여긴 커피숍이니 다른 볼일이 없으시면…….”
손님들이 여자를 힐끗 보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신기한 듯 오랫동안 지켜보는 20대 여성도 있었다. 주저주저하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여여기서. 쪼금 후에… 나남편을 만나기로…….”
“…….”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남편이 고고곧 올 거에요.”
“아…. 그러세요.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네… 고고맙습니다.”
나는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짧다는 것을 알았다. 절뚝이며 구석 자리로 걸어가던 여자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순간 마음이 아팠으나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며 아르바이트 최군에게 물을 한 잔 가져다주라고 했다. 최군은 겉으로는 싹싹한 표정으로 물 한 잔을 탁자에 놓고 왔지만 돌아와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사모님, 여기는 셀프인데 왜 물을 가져다주라고 한 거예요?”
“생각을 좀 해봐라. 저 여자가 물 마시려고 일어서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손님들이 좋아하겠니?”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대놓고 여자를 흉보았지만 곧 서너 명의 손님들이 몰려오는 통에 일단 흉보기는 중단되었다. 길에 난 작은 창을 통해 테이크아웃을 하는 손님들이야 굳이 가게 안까지 신경 쓸 일은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은 달랐다. 문 앞에 앉은 그녀를 보며 모두들 낯선 표정을 지었다.
시간은 벌써 4시 20분이었다. 여자는 등을 세우고 두 팔을 탁자에 올려 컵을 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창밖만 두리번거렸다. 손님 한 팀이 더 들어오자 나는 초초해졌다. 남은 테이블은 이제 달랑 2개였다. 5시가 되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남편께서 늦으시나 보네요.”
“아아… 어쩌면…. 그그런데 곧 올 거예요.”
“전화를 한번 해보시지죠.”
“저전 해핸드폰이 없어요. 조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예요. 미미안합니다.”
핸드폰이 없다는 소리에 나는 드러내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순간적으로 손님의 권리를 망각한 것이다. 어떻게 알아낼까 궁리를 하던 차에 여자가 수줍은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최군이 다가가자 또 물을 달라고 했다.
“저어 저…. 죄죄송하지만 물 좀…….”
“물은 갖다 드릴게요. 그런데 남편 분 오시기 전에 커피 먼저 드시면 안 될까요.”
최군이 딴에는 상냥하게 권하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아아 안 돼요. 고곧 남편이 오올 거예요.”
“아, 예…….”
시계는 어느덧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과연 저 여자가 우리 가게에서 커피 한 잔이라도 팔아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바리스타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사모님, 나랑 내기할까요?”
“무슨 내기?”
“저 아줌마의 남편이 올까요? 안 올까요?”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지 않을 걸.”
“그렇다면 저는 ‘온다’에 만원을 걸겠습니다.”
“좋아, 나는 ‘오지 않는다’에 만원을 걸지.”
“최군아, 넌?”
“저는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에 걸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남편이 오기는 하겠지만, 오자마자 그냥 나가버린단 뜻입니다.”
“오호!”
“하하하.”
내기를 하고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만약 남편이 와서 커피를 마시면 매출이 올라가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은 없다. 반대로 남편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이기는 것이니 역시 손해가 아니다.
8시.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가로등이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그때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네 시간 만에 처음으로 일어선 것이다. 우리는 그녀를 주시했다. 여자는 환하게 웃더니 절뚝거리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역시 그냥 가는군. 그럼 내가 이긴 거니?”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편이었다. 마흔 중반, 긴 얼굴, 움푹 들어간 뺨을 가진 남자였다. 남루한 파란색 잠바를 입고, 무릎이 튀어나온 낡은 검정 바지를 입고, 검정 얼룩이 묻은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촌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으며 남편을 의자에 앉혔다. 나는 최군의 옆구리를 찔렀다. 쟁반에 새 컵을 올린 최군은 물을 담아 그들에게 다가가 주문을 받았다.
“뭘 드릴까요?”
“커커피요…….”
“어떤 커피를?”
“그그냥. 보보통.”
“카페라떼로 드릴까요?”
“예? 에에.”
당황한 아내를 도와 남편이 거들었다.
“그럽시다. 그걸로 두 잔 주세요.”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동안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슬쩍 부부 옆으로 다가가 유리문을 닦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나를 힐끔 보고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꾸깃꾸깃한 만 원권과 오천 원권 지폐 서너 장이었다. 그 지폐들에는 검정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아내가 물었다.
“어…얼마예요?”
“오만 하고 칠천원이야.”
“우와. 오오늘은 어제보다 마많네요.”
“응. 근데 갈수록 손님이 줄어.”
“개갠찮아요. 고곧 좋아질 거예요.”
여자는 남편이 꺼내놓은 지폐를 두 손으로 정성껏 폈다. 그러고는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우우리 나남편이에요. 저 아래 육교 밑에서 구구두 닦아요.”
“아…. 네.”
“그근데 정식으로 허가가 안 나서…. 그냥, 쪼그만하게.”
“네. 그러시군요.”
그때 최군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 거품엔 바리스타가 하트를 그려놓았다. 남편이 커피를 살짝 마시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커피를 마시자고 한 거야?”
“우우리 겨결혼한 지 3년 되었잖아요. 그그동안 당신하고 분위기 낸 적이 어어없어서요. 오늘은 꼭 커피를 대…대접하고 싶었어요.”
“허허, 이 사람아 대접은 무슨. 그래서 여기서 날 기다렸어?”
“예에.”
“오래 기다렸어?”
“아아아니에요. 금방 와왔어요. 한 십분 되었나? 그쵸?”
나는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도로 위를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를 향해 그렇게 서둘러 가는 것일까? 남편은 커피를 바라보다가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값이 비쌀 텐데.”
“비비싸기는 해도…. 가가끔 당신에게 커피 정도는 사주고 싶어요. 이이야기도 나누고. 좋지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이제 두 사람이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채 두 걸음도 걷지 않아 나는 ‘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우리가 커피숍에 마주 앉았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마시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행복한 커피 타임은 아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내가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그런 기회가 없었다니. 서로 바쁘고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이지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에 그녀를 비웃었으나 정작 비웃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가난한 구두닦이의 아내지만 그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삶의 작은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여자였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돈이 뭐가 중요한가? 이번에는 부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 온기를 느끼면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남편의 얘기를 듣고 있는 표정. 여전히 촌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이제껏 마흔둘의 내가 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필자 이의수는 남성사회문화연구소(www.manis.or.kr) 소장(Ph.D)으로 마흔 이후 30년을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서드에이지 전문가다.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사랑의교회 사랑패밀리센터 책임자, 아버지재단 대표, CBS <기쁜 소식 좋은 세상>과 극동방송 <출발 좋은 아침>의 진행자, 문화일보 인기 칼럼니스트, 무엇보다 가족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40대의 가장이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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